2012-05-16
17세기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기였다. 인물의 특징을 정확히 포착한 프란스 할스(Frans Hals)를 비롯해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판화와 소묘, 유화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친숙하면서 신비로운 매력의 작품을 선보인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등이 활동한 시대답게 역사에 남을 걸출한 예술가들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이후, 네덜란드 출신 작가들은 그 정신을 이어 거장의 회화를 떠올리는 작품을 내놓곤 한다. 네덜란드 출신인 카틴카 램프(Katinka Lampe) 역시 프란스 할스의 감성과 베르메르의 캐릭터에서 차용한 초상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전통적인 방법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요소를 결합한다. 연출이 가미되었지만 작위적이지 않고,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다. 그의 그림은 자유롭고 독특하다.
글│이혜린 기자
기사제공│퍼블릭아트
화면 안에 한 아이가 있다.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낸 어린아이는 창백한 모습이다. 무표정한 얼굴로는 그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읽을 수 없다. 소녀인지 소년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는 듯하지만, 결코 관람객과 시선을 나누는 법이 없다. 눈길을 사로잡는 위력을 지닌, 익숙하지 않지만 썩 유별나지도 않은 인물들은 카틴카 램프의 모델들이다.
작가는 이렇듯 아이들을 작품의 피사체로 활용한다.
단순한 배경과는 달리 도드라지는 인물은 베르메르의 작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면, 두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다. 클로즈업된 상반신이나 어떠한 힌트도 알아차릴 수 없는 단조로운 정경, 그러한 분위기 덕분에 한층 신비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상. 그림을 그리는 작가나 관람객이 아닌, 화면 밖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 역시 그러하다.
진주>
인물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점도 흡사하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베르메르의 딸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설정 혹은 하녀일 수도 있다는 영화의 가정처럼 관람객은 자신만의 상상으로 인물의 성격과 직위 등을 짐작할 뿐이다. 물론 그 소녀가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은 카틴카 램프의 모델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작가는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제시하기는커녕, 이를 의도적으로 삭제한다. 아이들의 이미지는 TV와 잡지, 인터넷 등의 여러 미디어에 실린 사진이나 옛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특히 베르메르의 회화와 신문 기사에 실린 범죄자들, 지나치게 성적 매력을 노출한 모델들의 이미지들을 활용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한 인물의 외형이나 느낌을 사용하되, 짙은 화장이나 가면이나 베일, 가발이나 스카프 등 오브제를 덧붙여 인물의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베르메르와 카틴카 램프의 작품 모두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장르인 트로니(Tronie)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트로니는 이국적인 두상 초상화를 일컫는 용어다. 네덜란드 회화가 절정기를 맞을 당시 컬렉터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그려졌던 사치스럽거나 고풍스러운 그림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제 모델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인물을 주로 다루고 있다.
기존의 초상이 인물 고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려졌다면, 트로니 혹은 트로니적 요소가 담긴 그림은 화가에 의해 다듬어지고 매만져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 베르메르의 작품이 가상의 인물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장식이나 색을 덧붙였다면, 카틴카 램프는 상황에 맞지 않은 요소를 이용해 그들의 모습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데 집중한다. 이를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명확한 점은 작품에 대한 해석이 어느 방향으로 가지치기되든, 작가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끌어내는 이야기는 결코 가볍거나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아이들은 성인과는 달리 자신에 대한 명확한 모습을 갖추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과거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독립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아이들은 특유의 쾌활함이나 웃음기는커녕 어떠한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모습과 어른 흉내를 낸 어설픈 모습이 때로는 불편함을 동반하기도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섬뜩함과 기괴함마저 감돈다.
머리카락을 터번 속에 감추거나, 가면을 쓴, 혹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약자임을 확인하는 아이들. 어린이의 전유물인 순결함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의도적인 욕망이 결합해 있는 하나의 틀 안에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양극의 이미지들은 섞이지 않은 채 제각각 부유할 뿐이다. 눈으로 보이는 효과와 구성은 원본의 이미지가 가진 아우라를 상실한 채, 현실의 리얼리티를 감추고 있다.
구상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요소를 갖춘 카틴카 램프의 회화는 주체나 메시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유추할 실마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작가는 어른에게 맞춰진 기준과 체계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이들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제시할 뿐이다. 어른의 위치에서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가의 시선에는 순수함을 담보로 한 비틀어진 은유가 담겨 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올바르지 못한 이해관계를 내세우며 관람객에게 옳고 그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옮은 판단하도록 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