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9
사진가 오형근(48)을 만나러 ‘이태원’에 갔다. 그의 작업실 약도는 간단했다. 해밀턴 호텔, 이태원 소방서, 럭키클럽을 지나 킹 클럽과 한강 마트가 있는 건물 5층이 그의 스튜디오다. 건물 뒤편 주차장 쪽으로 들어가 좌측 ‘오형근’이라고 쓰여 있는 벨을 누르면 육중한 철문이 덜커덩 열린다.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 된 셈 치고 오랜만에 ‘이태원’에 온 기분을 내본다. 계단을 올라 널찍한 원룸 스타일에 들어서니 이국적이던 ‘이태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음전한 공간 하나가 펼쳐진다. 의외다. 난만하고 거친 바깥과 수줍으면서 반듯한 안쪽 사이에 오형근은 걸쳐 있다. 안과 밖의 콘트라스트가 혼선으로 애매모호한 그의 사진을 닮았다. ‘이태원’은 역시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그곳에서 10년 넘게 작업실을 지키고 있는 작가 또한 문문한 사람이 아니리라.
기사제공│월간사진
서울 용산구에 속한 행정구역의 하나인 이태원에 왜 굳이 따옴표를 쳤을까. 이태원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모든 가능성의 거리여서다. 프로젝트그룹 ‘유브이(UV)’의 랩송 ‘이태원 프리덤’이 찬양하듯 이태원은 심심할 때, 따분할 때, 음악이 있고 사랑이 있고 모든 젊음이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라면 굳이 이태원에 인용부를 붙일 필요까지는 없다. 이태원은 6·25 전쟁 뒤 한반도에 드리운 미국, 외세 문화의 그늘을 상징하는 거대한 거리 이상이어서다. 동두천이나 평택 같은 기지촌과 달리 이태원은 해방 이후부터 다양한 이종(異種) 문화가 자유롭게 만나 새롭게 재생산되는 일종의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이하는 생략이다. 한국인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제 느낌, 나름 추억만큼의 이태원이 따로 존재하리라 짐작하기에.
‘이태원 키드’, ‘할리우드 키드’
오형근에게 이태원은 피붙이 같은 고향이다. 6살 때부터 이태원에 살았다. 미군을 상대로 한 술집(클럽)이 가업인지라 온 가족의 생활터전이 이태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8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이태원은 그에게 놀이터이자 무대였으며 인생 교과서였다. 지금 작업실이 있는 골목 언저리는 일종의 적색 지대(Red zone)로 헌병이 순찰을 도는 출입 통제 구역이었다. 여기서 그는 인생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보았다. 미국에서 공수된 물건들과 할리우드 영화들, 그리고 미제와 한제가 혼혈처럼 중첩된 수많은 인간을 뇌리에 수집했다. 그가 지금도 ‘초딩 식성’에 외제 물건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안고 사는 까닭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남자 어른이 코카콜라·햄버거·켄터키 프라이드치킨에 입맛 다신다면 그 내력이 꽤 길다고 봐야한다.
“내가 미제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아버지가 구해주신 그런 유별난 물건들로 학교에서 힘깨나 썼죠. 중학교 때부터 영화에 광적일 정도로 관심이 많았고요. 미8군 영화동호회에 들어가 미친 듯이 영화를 봤으니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란 안정효씨의 소설은 제게도 딱 맞는 수식어죠. 웬만한 영화배우들 이름을 다 외웠으니까요. 미국 유학 가서도 거기 애들이 놀랄 정도라 ‘걸어 다니는 영화사전’이라 불렸죠.”
오형근에게 인생의 제1 목표는 영화였다. 아니 다른 삶은 아예 없었다. 그가 찍은 영화 포스터들을 떠올리면 ‘할리우드 키드’의 영화에 대한 꿈과 재능과 사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그를 사로잡았던 하길종 감독이 나왔다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UCLA를 염두에 뒀지만 1988년 상황은 그에게 다른 운명의 손짓을 보냈다. 맨 먼저 입학허가서를 보내준 브룩스 사진대학은 사진과목을 이수해야만 그가 원하는 영화제작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과정 필수학점을 따고 정작 영화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사소한 인간관계에서 터진 사건으로 결국 사진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자칫 우리 사진판은 사진가 오형근을 잃고, 영화판은 영화감독 오형근을 얻을 뻔 했던 필연의 노력이 있었으나 우연은 그 나침반을 거꾸로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 첫사랑 영화를 잊은 건 아니죠. 써놓은 시나리오도 몇 편 있고 지금도 시나리오를 씁니다. 감독 제의를 받은 적도 있고요. 맘만 먹으면 영화 찍죠. 내심 대중성 있는 장르영화로 방향은 잡아놨는데 망할 놈의 사진이 놔주질 않아요. 사실 처음엔 영화하다 보면 노는 시간이 많으니 그때 틈틈이 사진 찍자 했는데.”
인간은 내 사진의 재료다
오형근 사진에서 인간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온 풍부하면서도 측은한 재료다. 남녀 중에서는 여자, 노소 중에서는 소녀 쪽에 방점이 찍힌다. 물론 그를 화제의 인물로 만든 중년 여자 ‘아줌마’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은 민간인을 뛰어넘어 군인에 빠졌다. 공군, 해군, 특전사에 여군 가리지 않고 사계절 병영을 쫒아 다닌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소통능력에 작가는 더 관심을 쏟아왔다고 보인다. 주고받음을 거부당해서 혹은 차단당해서 불안하고 허무한 ‘중간자’의 처지에 대한 그의 몰입은 끈질기게 여일하다. 2009년 열렸던 ‘한국현대사진 대표작가’전 도록에 낸 오형근 자신의 글에서 그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얼굴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버리지 못해서인지, 혹은 버리기 아까워서인지 모르겠지만…/얼굴 속에 많은 과거의 풍경을 담고 있다/초상은 그 섬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내가 본 풍경은 불안이다/영혼이 잠식당할 만큼은 아니지만 실낱같이 여린 불안이다/어차피 초상은 냉정한 작업이고/나는 그들의 시선에서 삶이 만들어낸 가느다란 왜곡을 바라본다/그러고 나면 초상이 나를 보고 내가 초상을 본다/이제 좀 더 어두운 곳으로 간다.”
1993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막막하던 그 시절에 그를 다시 잡아당긴 곳이 이태원이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붙었던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아뿔싸, 그는 이 땅에서 ‘노바디’였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이방인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태원에서 봤던 수많은 혼혈, 짬뽕, 이도저도 아닌 중간자들의 불안을 찍었다. ‘아줌마’ 코드가 아니고, ‘소녀’ 도감이 아니었다. 그건 어딘가 속해 있고 싶어 발광하면서 그 불안으로 스스로를 발산하고 있는 중간자들이었다.
“인간 유형이 많은 나라는 위험한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중년 남자, 아저씨는 찍고 싶지 않아요. 지금 우리나라 소녀 애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면 발악하는 게 보여요. 물론 이 사회가 만든거지만. 그들이 엄마 됐을 때가 문제죠. 그 욕망을 어쩔 건지.”
계원디자인예술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며 10년을 봉직한 올해, 그는 안식년을 받았다. 이렇게 오래도록 학교에서 있게 될 줄 그도 몰랐다는데 그 변명이 재미있다.
“제가 벽이 많은 사람이라 말년에 외로울 것 같아서요. 제자들이 재미있고 발랄한 작업을 보여줄 때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내 생에 처음으로 사명감을 느끼고 있죠.”
1년을 쉴 수 있다기에 스페인 마드리드 쯤 가서 신나게 놀까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2월말에 갑자기 중국에 갈 일이 생겼다. 베이징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관광 유적지에 시골 소녀를 캐스팅하는 거리가 있는데 거기 가면 그가 찍어온 ‘화장 소녀’의 중국판이 널려 있다는 얘기였다. 이어 국립영화촬영소에도, 국립서커스학교에도 비슷한 촬영 기회가 많다기에 아예 초상사진의 무대를 아시아로 넓히기로 하고 중앙미술대학에 방문교수 제안을 넣었다. 그래서 한번 제대로 놀기로 했던 사진가 오형근은 결국 더 바빠졌다. 게다가 미국 물에 듬뿍 빠졌던 그가 이번엔 중국 물에 빠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외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 그가 중국 사람처럼 보인다. 그 역시 중간인이었다는 말인가.
- 사진가 변순철은 우리에게 ‘짝-패’ 사진작업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 현대사진가의 아카이브 프로젝트로 자의식이 드러난 작가의 모습을 세밀한 작업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 정재숙은 대학시절 학보사에서 암실의 매혹에 빠졌던 전직 사진기자다. 지금은 중앙일보 문화스포츠 부문 에디터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