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29
‘한 남자가 물 위를 걷는다. 걷다가 뛰다가 춤을 춘다. 한 남자와 200여 명이 함께 물 위를 걷는다. 걷다가 뛰기도 하며 춤을 추기도 한다.’ 이는 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2008년 공연을 시작한 이래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고 2010년 연말까지 공연수입이 약 7천만위안(120억 원)에 달했다는 중국의 고도 항주 서호에서 펼쳐지는 공연 속 장면이다.
글, 사진 | 구선아 객원기자
에디터 | 최유진(yjchoi@jungle.co.kr)
이 공연은 다름 아닌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베이징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을 연출한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인상서호’이다.
인상서호는 서호의 전설 백사전(白蛇傳)을 바탕으로 각색되었다. 백사와 총각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항주의 천고 이야기로 백사가 500년을 수행하여 인간이 된 후 만난 총각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지만 어느 날 나타난 법해선사(法海禪師)의 방해로 결국엔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맺는 내용이다. 총 5부로 나뉘는 공연은 1부 만남, 2부 사랑, 3부 이별, 4부 추억, 5부 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는 약 400여 명이나 되는데 이 400여 명의 퍼포머는 모두 이 지역 주민들을이다. 많은 시간동안의 연습을 통해 지역의 주민들을 진정한 배우로 무대에 서게 한 것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인상서호’가 다른 공연에 비해 특별한 것은 일반적인 공연시설에서 볼 수 없는 점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서호 호수 중 약 10만평을 이용, 승강식 무대를 만듦으로써 거대한 스케일을 선보이는 이 공연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현대식 산수화와 같은 무대배경을 갖는다. 호수경계에 만들어진 무대는 퍼포머의 움직임을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의 흔들림과 퍼짐, 물이 튀는 모습에 따라 퍼포머와 물은 혼합된 신선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연출되기도 하지만 색색의 조명과 퍼포머의 몸짓과 오브제가 물에 비춰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출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시각적 자극을 주기도 한다.
바람에 의해, 퍼포머의 움직임에 의해 또는 무대장치에 의해 흔들리는 물결에 비친 그 모든 것들은 새로운 조명이자 새로운 몸짓이며, 새로운 오브제가 되어 무대를 채운다.
특히 산을 형상화 해 물이 스모그와 함께 하늘높이 치솟을 때에는 1,000여 석이 넘는 관람석이 들썩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도 줄곧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관객들까지도 좌석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한다.
지금까지 공연에서의 물은 잠시 등장하는 소품이거나 장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역할 정도에 그쳤지만 ‘인상서호’에서는 장소, 장면, 소품으로써의 역할은 물론 조명과 배경, 무대로 온전히 관람객과 마주하고 있다. 또한 물의 움직임과 퍼포머와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퍼포먼스는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물과 함께 하는 무대는 때론 부드럽지만 강한 힘을 가진 한 폭의 수묵화 같기도 하고, 때론 발랄하지만 슬픈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하며, 촌스럽지만 친근한 중국의 어느 시골 풍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공연은 다양한 색과 물의 움직임에 의해 관람객들을 더욱 몰입시킨다.
또한 인상서호는 중국에서 처음 시도되었다는 이어폰 사운드시스템과 대형의 고정 사운드시스템을 통합 운영하여 200여명이 함께 등장하여 군무를 이룰 때는 더할 나위 없는 웅장함을 맛보게 하며 슬픈 이별의 장면에서는 서정적인 사운드에 더 깊이 감정이입 할 수 있는 등 매 장면마다 보다 리얼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몇 년 전만해도 항주는 선사시대부터 수나라, 위진남북조 시대 등 수세기의 문화와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고도 정도로 인식되었고 서호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뱃놀이 정도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이 초대형 수상 가무쇼는 어느덧 항주에 들리는 모든 사람들이 꼭 보아야할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지금도 매일 밤 서호에서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물짓이 출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