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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 리뷰

문화, 감성, 소통의 ‘멀티’한 공간 경험

2009-01-20

직육면체가 아닌 빌딩들도 간혹 멋지게 소화해온 21세기 서울의 건축감각이 곡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파격적인 건물을 수용했다. 직선의 건물들 사이로 멋들어진 스카이라인을 허용하는 테헤란로와도 멀지 않은 대치동의 크링(kring)은 문화와 예술, 감성과 소통을 하나의 공간에 담고 있는 동시에 낯선 공간 경험의 묘미를 제공하는 멀티 스페이스다.

에디터 | 김유진(egkim@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물결치는 듯한 한 건물의 외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원이 여러 겹의 층을 이루며, 안으로 안으로 파고든다. 반대로 바깥으로 발산되는 또 다른 원들은 곡선이 되어 건물 외벽에 규칙적인 패턴을 만든다. 사각형으로 각이 지워진 빌딩만큼이나 날카롭게 깎여있는 건물 라인에서 운동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건 동그라미라는 조형적 요소의 힘이다. 독특한 디자인이 압도하는 건물에 역동성과 율동감이 균형을 맞춘다.

계단을 올라서면 바닥에 접해있는 원 하나가 입구로 안내한다. 동그라미 제국에 입성을 알리는 자동문이 열리자, 비현실적인 공간의 이미지가 현실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감각이 인지한다. ‘모던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공간의 분위기는 ‘환상적’이라는 단어로 채울 수 밖에 없다.
전시장, 영화관, 공연장, 세미나실, 테마카페, 옥상 정원 등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모든 방식의 공간을 포함한 곳이니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문화와 예술을 이 거대한 공간 안에서 마음껏 누리라는 배려에는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즐기라는 뜻도 숨어있다.

동그라미라는 컨셉트가 패턴으로, 평면으로, 동그란 기둥으로, 이형 분열하는 공간은 (주)운생동건축가사무소의 장윤규, 신창훈의 작품이다. 2008 한국공간디자인대상에서 대상에 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며 그 독특한 건축적 미감을 인정받았다.
기업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금호건설이 시공 및 운영을 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특정 기업을 연상케하는 어떤 표시도 없다. 오히려 모든 공간의 수익금은 각종 행사나 단체들에 기부되는 식이니, 어쩌면 이 복합문화공간을 한없이 누리는 것이 크링을 이용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네덜란드어로 ‘원(circle)’을 의미하는 복합문화공간 크링은 타국의 언어만큼이나 생소한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첫인상부터 관람객을 몽롱하게 했던 입구 정면의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도 활용되는 아트리움. 가로로 크게 펼쳐져 있는 벽면의 LED화면, 순백의 타일로 꾸며진 바닥과 벽, 하얀 조명, 유독 낮게 처리되어있는 천장까지, 지금 서있는 곳의 좌표도 헤아릴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때마침 열리고 있는 <홍성철전> 은 평면 사진의 새로운 차원을 정의하고 있었다. 탄성 소재의 줄에 프린트해 설치한 사진 작업들이 공간의 이질감을 부추긴다.

하얀 타일 바닥 사이로 나있는 푸른 빛의 타일은 공간의 포인트다. 그 바닥 길이 띠를 이루며 벽면의 LED화면을 거쳐 3층까지 이어진다. 바닥과 천장, 가로축과 세로축을 넘나드는 크링의 리듬감이다. 공간 오른편에는 극장 입구가 보인다. 영화 역시 이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 중 하나다. 64석의 아담한 소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로그램은 주로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다. 그 옆에는 나무 느낌의 소재와 컬러풀한 아이템을 비치한 휴게 공간이 있는데 컴퓨터가 비치되어 있어 각종 검색이 가능하다.

입구 기준으로 왼편을 바라보면 푸른 빛깔에 흠뻑 취해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위용을 자랑한다.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두는 듯하다. 오히려 2층의 공간은 현실적이다. 자작나무 소재로 한껏 꾸민 라운지는 테마 카페와 더해 편안함과 여유로움에 맞춰진 현실의 시공간이다. 다목적 공간인 빈티지 홀과 전시전용 공간인 크링홀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서일까, 이상적이면서도 인공적인 분위기가 닿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오히려 건물 내부에서 가장 동떨어진 곳이다.

크링의 공간과 공간 사이는 대부분 개방적인 형태를 취해서 다른 층에서 내려다 보거나, 한쪽 공간에서 다른 쪽 공간을 바라보는 재미를 준다. 계단을 오르면서 1층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계단에 서있는 높이에 따라 바라보는 느낌도 다르다.
거대한 공간 내부는 독특한 동선과 공간 배치, 그리고 높이마저 제각각인 특성을 가져 이러한 방식의 ‘공간 놀이’가 가능하다. 아트스퀘어의 바로 윗 편, 2층 브릿지 공간에서는 3층 높이의 높다란 창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각 층의 난간에서는 원의 컨셉트를 수용한 거대한 통로와 계단 등 인테리어 요소로 건물 전체의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계단과 통로만 개방한 3층을 지나 4층으로 올라가면, 스카이가든이 나온다. 거대한 두 동그라미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계단식 노천극장의 형태를 취한다. 옥상 정원임에도 좌우에 벽을 두어 탁 트인 느낌 보다는 독립적인 특별 공간의 형태를 띈다. 분위기가 외부 풍경의 영향을 받아 발산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 풍경을 공간 내부로 끌어들이는 설계다.

멀티스페이스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공간이 의도한 컨셉트에 충실하는 것이다. 크링은 동그라미이고, 동그라미는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다. 혹은 처음과 끝을 확인조차 할 수 없다. 원점을 기준으로 반지름이라는 동일한 거리를 유지한 채 연결되어 있다.
원활하게 소통하고 평등하게 존재하는 곳. 명화의 소유는 특권이고 공연장에서 허락하는 시야는 관람등급과 연결되지만, 예술작품에 감동하고, 문화를 즐기고,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사실. ‘문화, 예술, 감성과 의사소통의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순수 복합문화공간’은 바로 동그라미의 조형성이 직역하는 크링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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