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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월드리포트

노팅힐에서 보물찾기

이서진 런던통신원 | 2007-02-20



과제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바로 안 떠오를 때가 태반이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파고들수록 미궁에 빠질 때가 많은데, 이럴 때에는 관련분야 책을 쌓아놓고 보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또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과감히 그 문제에서 벗어나 잠시 커피 한잔에 바람을 쐬기도 한다.

필자는 뉴욕 유학 생활 중 Pentagram 이라는 디자인 회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Bob Gill 교수의 광고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통의 디자인 수업이 결과물에 포커스가 맞춰있는 것과 달리 그 수업은 디자인 결과물보다는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토론하고 연구하는 수업이었다. 그 분은 ‘경험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느냐’며 항상 학생들을 질책하셨다.

예를 들어, 세탁기 광고나 세탁소 광고를 하기 위해 그 문제가 주어진 이후 당신이 직접 세탁을 하며 그 디자인을 생각해 보았냐는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 속으로만 하는 세탁의 개념은 진정한 세탁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했던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셨다. 예전에 알았던 어렴풋한 기억이나 간접경험으로는 살아있는 생생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간단하지만 영원한 진리를 그때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무엇이 되었건 어디에 있건 일단 많이 보고 경험하라는 것이 그분의 디자인 철학이자 이제는 나의 좌우명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 디자이너에게는 ‘보는 만큼 아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도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아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감 중에 시각적인 자극에 유난히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또 다른 볼거리를 창조해낸다. 그런데 사람들은 잔잔한 자극들도 잘 기억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신선한 자극에 더 잘 흥분되고 각인시킨다. 디자이너들 중에 유달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런 시각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들과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머릿속 보물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필요할지 모를 그리고 어쩌면 지금 당장 필요한 아이디어를 위해 열어볼 보물상자. 이번달에는 런던에서 살아가며 무한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곳, 노팅힐의 Portobello Market으로 보물찾기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취재ㅣ이서진 런던통신원(seojinlee@gmail.com)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 주연의 영화 노팅힐로 더 유명해진 이곳은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매주 토요일에 Portobello Market이라는 장이 선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비가 오건 날씨가 좋지 않건 항상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연령과 취향만큼이나 이곳에서 파는 물건들도 시대와 인종과 문화를 떠나 정말 다양하다. 폴토벨로 마켓을 설명해주는 사인에 있는 것처럼 앤티크에서부터 새로운 물건까지 그리고 청과시장에서 수산시장까지 규모는 작아도 없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노팅힐 초입에 있는 이 가게는 다양한 빈티지 물건들을 판매하는 곳이다. 특히 옛날 사인들이나 간판, 혹은 광고판 같은 것들을 보아놓고 있어서 아치 광고계의 40-60년대 자료집을 펼쳐 놓은 듯 주옥 같은 물건들이 많이 있다. 이 작은 판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려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듯 하다. 손으로 그린 일러스트를 위주로 한 광고들이 주로 눈에 뜨인다. 귀여운 금발의 어린 아이들이나 곱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무언가 광고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이니 일일이 광고의 주인공들을 일러스트 작가들이 그려냈었다.



무엇인가 모으는 것에 취미가 있는 수집광이라면 꼭 한번 와보고 싶은 곳이 이곳 폴토벨로 마켓이다. 각국에서 산 넘어 바다건너 온 다양한 물건들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한 곳에 모여있으니 얼마나 다채롭겠는가. 런던이라는 도시가 다민족 도시이다 보니 그 안에 담고 있는 문화의 다양성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여행 중에 혹은 사업 아이템으로 모은 것을 하나의 컬렉션으로 집대성하였으니 각국의 문화와 시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앤티크 컬렉션 가게들이 즐비할 수 밖에 없다.





유럽에는 ‘카니발’이라는 종류의 축제가 있다. 이들은 가면을 쓰고 축제에 참여하는데 이유인 즉, 나쁜 것들을 내쫓고 좋은 것들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영혼들의 생전 모습과 같이 분장을 하고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때지어 모여 다니며 소란스럽게 춤을 추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악한 영혼은 추악한 모습의 가면, 가난한 영혼은 남루하고 낡은 누더기 가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근대로 오면서 이런 카니발의 의미도 많이 달라져서 축제의 면모를 많이 띠기 때문에 가면들도 더 화려하고 화사한 것들을 많이 쓰고 있다. 일종의 우리 나라의 탈과 비슷한 것인데 서양인들의 이목구비가 우리네와는 많이 달라서 인지 굴곡도 많고 크기도 작다. 소박한 것이 멋이었던 우리 나라 전통 탈에 비해 구슬이나 금가루, 레이스 등 화려한 재료들을 선호했던 유럽인들의 문화적 성향이 엿보인다.




이 곳이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샘솟게 하는 보물창고라고 말하는 이유는 위에 등장하는 이런 소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활자 같이 화려한 나뭇잎들이나 꽃잎들로 장식된 화려한 서체의 알파벳 하나하나를 파는 가게들이 두 세군 데 있다. 장사하는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이런 활자를 만드는 장인이었고, 아버지는 아직도 이런 활자들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마치 도장처럼 잉크에 찍어서 디자인에 활용할 수 있는 소품으로 형식이 간소화되었다. 필자도 이런저런 이유로 올 때마다 몇 개 구매하였는데 마치 디자이너로써 작은 보물을 소유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런던을 떠나기 전에는 저 위에 보이는 타이프 라이터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칼라 프린터나 복사기가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저 타이프 라이터로 일일이 문서를 쳐서 작성해야 했고, 그것만을 담당하던 직업도 있었다. 지금은 컴퓨터에서 명령 하나로 멋진 문서가 칼라로 수 십장 수 백장씩 원하는 만큼 뽑아져 나오는 시대이지만, 손가락 움직임의 세기에 따라 잉크가 종이에 묻혀지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왠지 저 타이프 라이터가 내 책상 한 켠에 놓여있으면 디자이너의 손 느낌이 느껴지는 어느 정도는 아날로그적인, 혹은 휴머니즘적인 멋진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종의 미신 같은 것 말이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스윽 문지르면 먼가 멋진 문구와 먼가 멋진 영감을 나에게 줄 것만 같다.

또한 프러덕트 디자이너들에게도 이곳엔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다. 위트가 담긴 비누받침대는 욕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욕조에 수도꼭지 두 개가 앙증맞게 달려 있는데 크기를 줄여 비누 하나를 놓을 수 있는 아담한 사이즈로 줄였다. 체스 판은 개구리 왕눈이를 연상시킨다. 흔히 보이는 블랙 앤 화이트의 칼라 배합이 아닌 베이지와 초록색의 배합이 신선하고 개구리 발모양의 체스 병정도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한다.




노팅힐은 영화를 통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졌다. 영화 속 남자주인공 휴 그랜트가 운영하는 서점은 실제 존재하는 곳으로 지금은 관광명소로 여행책자에 소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내부는 영화 이후 리노베이션을 했기 때문에 영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래도 입구 정면에 영화포스터와 같은 디자인의 소설이 놓여져 있는 것으로 영화의 그 장소를 맞게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된다. 런던에 관한 것 이외에도 다양한 나라와 도시로 가는 여행 책자들이 구비되어 있어 찾는 이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관광 명소 외에도 이곳의 상권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신선한 아이디어로 티셔츠나 디자인 용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보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매장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픽토그램을 응용해 간결하지만 유머감각이 뛰어난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강아지가 고양이를 추격하는 그림 밑에 ‘Fast Food(패스트푸드)’ 라고 적혀있는 셔츠. 고양이와 강아지의 추격전도 재미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패스트푸드와 연결시킨 것도 특이하다. 화장실 사인에서 주로 보이는 남녀 픽토그램을 접목시켜 결혼을 하면 게임 끝이라는 슬로건을 만든 티셔츠. 디자이너가 왠지 남자였을 것 같다는 인상이 짙다. 남자는 찡그린 표정인데 반해 여자는 웃고 있으니 말이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사람과 컴퓨터에서 파일을 다운로드 받는 것을 연결시킨 티셔츠. 그리고 IPOD 광고에서 연결된 iPOPE는 카톨릭의 교황을 의미하는 모자와 연결시켜 아이디어를 전개했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던 PUMA 시리즈와 일맥상통하는 패러디 티셔츠들이 흥미롭다.



꽤 긴 거리를 따라 여러 상점들과 노점상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덧 배도 출출해지고 다리도 아파온다. 이럴 때 주위를 둘러보면 유럽 각국의 음식들을 싼 값에 맛볼 수 있다. 우리나라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맛보는 포장마차의 떡볶이나 오뎅 같은 음식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독일 식 소시지 요리나 핫도그, 스페인의 빠에야(우리나라의 볶음밥이나 비빔밥과 유사하다), 프랑스의 크레페(우리나라 식 밀전병 같은 디저트) 등 다양한 음식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독특한 음식들을 먹어보며 이국의 문화를 미각으로 느껴보고 그 안에 숨겨진 색깔 배합이라던가 풍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앤틱 가게, 빈티지 컬렉션, 벼룩 시장 같은 것들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다. 인사동에 있는 골동품 가게 정도가 오랜 터줏대감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정도이다. 살아있는 디자인 역사책을 보고 있는 듯 거리에서 직접 오래된 물건들을 만져보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인터넷이 발달하여 자판 몇 번만 두들이면 내가 원하는 자료들이 다 쏟아져 나오는 쉬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숨겨진 보물을 찾는 행복은 아마 인터넷 상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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