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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인터뷰

디자이너, 농삿꾼을 만나다

2011-01-19


본질을 깨닫는 과정은 쉽지 않다. 설사 깨달음이 있었다 해도 그 진리를 끝까지 고수하는 일 또한 지난하다. 선생은 선생답게, 장삿꾼은 장삿꾼답게,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답게 사는 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판단기준과 가치를 적용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이는 더욱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있다. 스스로를 ‘잡(雜)하다’ 말하는 그가 어느 날, 멕시코 쌀띠요의 어느 거리에서 일군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액션쌀띠요’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의 열정에 감염된 그는 서울로 돌아와 ‘액션서울’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들에게 처음 맡겨진 프로젝트는 경북 봉화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와의 만남. 그들은 속속들이 알찬 사과를 재배하는 농부와의 협업을 통해 이른바 ‘본질’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하게 된다. 파머스 파티를 기획, 진행하고 있는 액션서울의 디자이너 이장섭과 한지인을 만났다.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지난 해 늦가을 무렵, 광화문 일대에서는 독특한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I am your Farmer : 사과 드리러 오겠습니다’라는 재치 있는 카피와 더불어 다스베이더 가면을 쓴 농부가 사과를 나눠주는 이벤트였다. 이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팀이 바로 디자이너 이장섭이 이끄는 액션서울. 그들의 프로젝트 파머스 파티(Farmer’s Party)를 수주한 경북 봉화의 농부 이봉진씨는 액션서울의 첫 클라이언트이다.

“굳이 브랜딩을 하시겠다는 의도는 없었대요. 농산물의 중간 유통 마진이 엄청나니까, 어떻게 하면 중간 유통을 생략하고 질 좋은 사과를 소비자들에게 직접 공급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디자인을 직접 입혀야겠다는 결론을 내셨다고 해요. 지인에게 저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저희도 이 프로젝트가 욕심이 나서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나섰고요.”

액션서울의 책임 디자이너이기도 한 이장섭은 봉화의 농부 이봉진씨를 ‘지금까지 만나 본 중에 가장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라고 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디자이너가 작업해야 하는 영역에 대한 무한신뢰를 보여준 흔치 않은 클라이언트’인 그가 어찌 하여 가장 까다로운 클라이언트가 되어야 했던 건가.

“저희가 내린 디자인적 선택에 전혀 개입을 하지 않으셨어요. 대신, 그 분들이 사과를 재배할 때 정성을 들이고 완성도를 만들어냈던 것만큼 디자인에 대한 태도 역시 동일하길 원하셨죠. 그런 조율을 해가는 과정이 기존과는 가장 달랐어요. 저희 나름대로는 학습을 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처음엔 만만하게 생각했죠. 지금까지 대기업을 상대로 꾸준히 일을 하면서 가지게 된 자신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브랜드 디자인이나 패키지 디자인 정도는 정말 잘 할 수 있었으니까. 또한 사과라는 매력적인 대상이 있는데 그걸 이용해 디자인을 예쁘게 하는 게 뭐가 어렵겠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다지 만만치 않은 작업이더군요. 친환경이라는 프리미엄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에 대한 대응과 안전한 배송,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사서 먹을 정도의 매력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했죠.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만만한 것이 아니었던 거죠. 패키지에 대한 기대도 역시 지금까지 경험해봤던 여타의 클라이언트에 비해 월등히 까다로웠고요.”


파머스 파티는 여타의 농산물 브랜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기존의 농산물이 주로 장년층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되었다면 파머스 파티의 타겟은 20~30대의 싱글 및 2인 가족이다. 그들의 특성에 맞춰 중량을 조정했으며 디자인을 기획했다. 작은 소비를 하더라도 패셔너블한 코드를 원하는 타겟층의 수요에 맞춘 것이다.

“최근에 구매하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좀 기대가 되요. 패셔너블한 패키지 덕분에 젊은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관심을 보이신다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거든요. 파머스 파티의 사과는 품질에 비해 가격에 마진을 많이 붙이지 않은 편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이 있다고 보고 있죠.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그들의 클라이언트인 봉화 농부 이봉진씨의 생각이 숨어있다. ‘완벽한 품질을 보장할 테니 격에 맞는 디자인을 원한다’는 그의 요구는 생각 이상으로 완고했다고. 패키지 때문에 가격이 오르는 상품은 그의 생각에는 옳지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저희는 디자인이 가진 메리트로 상품을 이끌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디자인 작업 중간중간에 이런 생각들이 많이 반영되었죠. 그런데 이분들의 생각들은 좀 달랐어요. 충분히 좋은 디자인이지만 그게 상품의 질을 앞질러 가격을 좌우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죠. 이상하게 인터뷰 하는 날마다 사건이 터지는데 오늘도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어제까지 설날 패키지로 럭셔리 라인 3종 세트를 준비했었죠.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3종에 대한 가격정책 원하지 않는다는. 사과 때문이 아니라 패키지 때문에 가격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차라리 본인들의 금년도 수익을 포기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모든 가격대를 원래대로 다시 다 돌렸죠. 그분들께 죄송하기도 하고 나름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좋은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이장섭과 액션서울에게 있어 봉화 농부와의 작업은 디자이너로서의 본질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디자이너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매너리즘과 자아도취는 작업의 질을 갉아먹는 요인 중 하나. 하지만 봉화 농부와의 작업에서는 그런 군더더기가 생길 틈이 없다. 그들의 요구는 늘 일관적이고 명료하다. 이런 명료함은 디자이너 이장섭에게 있어 꼭 필요한 자극이었다고. 이런 그의 태도는 평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모순점이 정말 많아요. 모든 것을 되도록이면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지만 사실 내면에서는 안티가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입니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사실 부정적인 것이 너무 많이 보여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지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생각이 없다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잖아요. 멕시코에서 액션쌀띠요 친구들을 만났을 때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어찌 보면 촌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들은 본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긍정적인 방식으로 승화시키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액션서울의 모티브를 얻었어요. 멕시코의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도 분명히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앞으로도 이장섭과 액션서울의 갈 길은 멀다. 산적한 수많은 일 이외에도 가장 우선되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이 복잡한 도시에서 그들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

“봉화에 계시는 농부도인과의 프로젝트는 아마 계속 진행될 것 같습니다(웃음). 저는 이 분이 꼭 새로운 농산물 유통의 모델이 되는 것을 보고 싶거든요. 현재 저희 액션서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 내릴 단계는 아닌 거 같아요. 되도록이면 도시와 호흡하는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앉아서 뭔가를 하는 것 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여서 솔루션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요. 지금 저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창조적인 맨파워를 통해 우리들만의 생각과 개성을 담아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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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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