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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초록빛 공동의 자리를 위하여

2012-08-28


양수리의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서로의 살을 부비며 한강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여정을 함께 시작하는 곳이기에, 같은 듯 다른 차이들이 무탈하고 평화롭게 섞인 적막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이다. 두물머리로 들어서는 길가에서 초록 물이끼로 가득한 작은 못을 보게 되었다. 강아지풀과 여러 들풀들과 함께인 그 장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세상을 떠돌던 온갖 초록의 씨앗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듯 다른 초록을 서로에게 뽐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르지만 같고 같으면서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공존하는 장소로써 두물머리의 초록 물가는 우리(너와 나) 안의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고 넉넉히 품을 수 있는 ‘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러한 공동의 자리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어떻게 함께 더 만들어가야 할지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곳은 나에게 두 물줄기가 동등하게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지그시 응시하며 나누는 나직한 속살거림이 들리는 장소, 그리고 ‘공동(共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시작되는 장소가 되었다.

글, 사진 | 안은희 리코플러스 대표(akkanee@empas.com)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수평적인 시선의 유희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캠벨 수프’ 연작을 보면, 토마토/야채/검은 콩/치킨 누들 등 캠벨 통조림들이 쭉 늘어서 있다. 안에 담겨진 내용물보다 내용을 담는 통조림이라는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해보면 유사함을 전제로 한 차이들이 보인다. 이때 비슷한 것들 사이의 차이에는 일종의 리듬이 만들어지는데, 서로를 끝없이 바라보고 참조할 때 생겨나는 리듬이다.1) 이러한 리듬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2) 이처럼 비슷한 것들이 서로를 마주할 때는 서열(위계)보다는 주고받고 의지하고 겹쳐지는 리듬, 일종의 ‘유희’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서로를 응시하지 않고 자신만을 바라보게 되면 상대를 보지 않기에 나와 닮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나만의 개성 또는 권리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1) 현대 미학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푸코의 ‘상사(相似)’,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보르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 개념들 모두가 서로 닮은 것들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에 대한 해석이다.
2) 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민음사, 1998, p.72


유사한 것들 사이에 발생하는 위계와 권력의 사례는 우리 사회 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김애란의 신작 소설집 「비행운」에 실린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라는 단편소설의 주인공 용대와 명화의 이야기는 최근 증가하는 국제결혼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불편한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통조림이라는 동일한 형식에서 볼 때 내가 토마토 통조림이라면 그들은 야채 통조림일 뿐인데, 우리는 다름만을 더 크게 키워 보고 심지어 나보다 못하다는 차별의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설에서 이방인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람은 우리 안의 또 다른 루저이자 사회와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취급 받는 용대였다. 그러나 그런 용대조차도 처음에는 조선족 명화를 홀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수직에서 수평으로 시선의 눈높이를 낮추니 그때서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죽은 명화가 녹음해준 중국어 문장을 택시에서 따라 중얼거리면서 그는 비로소 그녀와 마주하는 자리에 서 있게 된다. 테이프에서 반복되어 들렸던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3)라는 소설 속 문장은 우리 안의 이방인들의 자리와 우리 자신들의 자리, 그리고 ‘우리들’의 자리가 어딘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시선, 주거니 받거니 유쾌한 리듬이 생겨나는 시선, 그 시선들이 수평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우리 안에 퍼져나갈 때, 우리는 공동의 자리가 만들어내는 청량한 공명을 느끼게 될 것이다.
3)김애란,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p.168


마주하는 시선의 아름다움

비슷한 것들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수평적인 유희를 우리의 디자인 환경에서 발견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수평적 마주함만으로는 경쟁구조에서 살아남기 힘들기에, 어느새 ‘과잉’은 우리들에게 자연스러운 디자인 어휘가 되어 버렸다. ‘디자인 서울’ 또는 ‘디자인이 경쟁력이다’와 같은 슬로건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익숙해질 정도로 최근 우리는 온통 ‘디자인’에 둘러싸인 삶을 살고 있다. 디자인이 너무 흔해지다보니 이제는 흔해지지 않기 위한 고투가 시작된다. 유사한 것들 사이에서 선택 받기 위해서는 더 눈에 띄어야 하고 나아가 구입한 사람들의 품격까지도 올려준다는 암묵적 약속까지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브랜드 디자인’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자인 경쟁이 디자인 과잉으로 넘쳐흐를 때 쉽게 흘려버리게 되는 것이 디자인이 시작되는 출발점의 마음과 자세이다. 인문학자이면서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소통의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로버트 그루딘(Robert Grudin)은 디자인의 기본으로 과잉을 잠재운 사례로 16세기 일본의 다도이야기를 끄집어냈다.4)
4) 로버트 그루딘, 「디자인과 진실」, 북돋움, 2011, pp.26~29

그루딘은 다도에 대한 상반된 시각을 비교하면서 디자인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다도를 특별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화려한 도구로 취급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와 간소하고 공평하고 신실한 다도문화를 주장했던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 이 두 사람의 다도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결국 무엇을 보느냐의 차이였다. 한 사람은 자신만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과 대상을 함께 마주보았다. 리큐의 다도는 ‘차를 마시는 행위’의 기본을 돌아보면서 시작된다. ‘차’와 ‘차를 마시는 사람’에만 집중하면 나머지들은 없어도 상관없는 ‘과잉적인 것’이 된다. 차와 사람의 마주함은 나아가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되며, 그 간결하고 질박한 관계맺음의 아름다움(와비)으로 인해 주변 관계 전반을 재조직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마주하는 소통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창조, 즉 디자인이다. 아마도 디자인의 본질은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만 중요해지는 화려한 과잉과 시끌벅적한 과시에서는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서로를 마주하는 그윽한 시선과 귀 기울임 속에서야 겨우 그 희미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긴 호흡으로 공동의 자리 만들고 지켜가기

오랜 시간을 해로해온 부부들이 서로 닮듯이 오래 마주하다 보면 서로 닮아간다. 긴 시간을 봐왔기에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기에 긍정하게 되고 긍정하기에 닮아가게 된다. 닮지 않음으로 인해 서로 상처받고 부대끼는 시간들을 함께 겪어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닮음이 있다. 이처럼 긴 호흡의 마주함은 자연스럽게 서로가 섞여 들어간 공동의 터를 만들어낸다. 차이가 부식되어 이해와 긍정의 토양이 된 그 터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단서를 두물머리와 초록물가에서 발견하였다. 터를 만들기도 힘들지만 만들어진 터를 잘 지키는 것은 더 힘든 일일 것이다. 얼마 전 출근길에 발견한 플랜카드의 문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도 우리가 오랜 시간 지켜왔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나가야 할 터가 가지는 바로 그 ‘공동의 삶과 가치’ 때문이었다.

“발전보다 밭전을 레져보다 삶을 사대강 녹조라떼보다 유기농 딸기를 원합니다. 두물머리 유기농지 강제철거 안돼요.”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색’이 있었다. 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허름하고 좁은 골목, 남의 집 대문과 같은 장면들은 우리들의 눈과 귀를 머물게 한다. 우리의 눈에 의해 포착되어서 어느새 우리의 마음의 의미로 포획되어 버린 장소 이야기, color of village는 그런 장소와 장면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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