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6
유엔 회원국 표기상 북한의 공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DPR Korea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름은 가장 강력한 브랜딩이다.
브랜드를 만들 때 가장 먼저 결정하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정체성의 선언이며, 존재의 압축이다.
기업도 그렇고, 도시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다.
국가의 이름, 즉 국호는 한 나라가 세계를 향해 내미는 가장 공식적인 브랜드 자산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오랫동안 예외처럼 취급돼 왔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한다.
이 헌법 조항 때문에 우리는 북한을 일반적인 외국 국가처럼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역사적·법적 배경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어적 관성이 영원히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수원에서 열린 AFC 여자 클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기자회견은 이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들었다.
북한 여자축구팀 내고향 FC가 우승한 뒤 공식 기자회견 자리였다.
한국 기자가 ‘북측 여자축구’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북한 감독은 즉각 불쾌감을 드러냈다.
“우리 나라의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달라.”
이후 기자회견은 사실상 중단됐고, 감독과 선수단은 자리를 떠났다.
겉으로 보면 작은 해프닝이다.
하지만 디자인과 브랜딩의 관점에서 보면 꽤 상징적인 사건이다.
<문제는 ‘북한’이 아니라 ‘북측’이었다>
분명히 하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은 ‘북한’이다.
이번 사건은 ‘북한’이라는 단어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북측’이라는 단어였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북한’은 적어도 하나의 정치적 실체를 지칭하는 약칭이다.
하지만 ‘북측’은 다르다.
국호도 아니고 약칭도 아니다. ‘방향’이다.
국가를 ‘방향’으로 부르는 언어는 외교도 아니고 국제 예의도 아니다.
동쪽, 서쪽, 남쪽, 북쪽 같은 좌표 개념일 뿐이다. 국제 스포츠 공식 기자회견에서 상대 팀을 ‘방향’으로 부른 셈이다.
프랑스를 ‘서측’이라 부르지 않는다.
일본을 ‘동측’이라 하지 않는다.
중국을 ‘서북측’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브랜드 세계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은 존재를 흐리는 행위다.
<달라진 건 북한의 언어다>
흥미로운 변화가 있다.
과거 북한은 대한민국을 ‘남조선’ 혹은 ‘남조선 괴뢰’ 등으로 불렀다.
‘대한민국’이라는 공식 국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최근 북한은 대남 담화와 공식 매체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례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것이 화해의 신호는 아니다.
오히려 남북을 별개의 국가로 규정하며 적대적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정치적 변화의 결과에 가깝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정치적 의도가 아니다. 상대의 공식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다. 브랜딩 관점에서 보면 이건 적지 않은 변화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상대가 우리의 공식 국호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방향 개념의 언어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상호 존중은 체제 승인과 다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이 글은 북한 체제를 승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상호 존중과 체제 인정은 다른 문제다.
기업 간 법적 분쟁이 있다고 해서 공식 석상에서 상대 회사 이름 대신 “저쪽 회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감정과 원칙은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유엔 회원국 표기상 북한의 공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DPR Korea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건 정치적 지지가 아니다. 국제적 표준이다. 상대를 정확히 부른다고 해서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국가 브랜드는 언어에서 드러난다>
세계는 이름을 전략적으로 관리한다.
터키는 Turkey 대신 Türkiye를 선택했다.
체코는 Czech Republic 대신 Czechia를 공식화했다.
네덜란드는 ‘Holland’ 대신 ‘Netherlands’로 정리했다.
국가는 이름을 브랜드 자산으로 관리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언어를 돌아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다.
K-컬처와 산업 경쟁력, 민주주의 경험까지 국가 브랜드는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런 나라가 여전히 냉전 시대의 언어 습관에 갇혀 있는 건 어색하다.
‘북측’은 분단 시대가 만든 언어다. 과거에는 의미가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국제적 공식 공간에서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국호도 브랜드다>
공공커뮤니케이션은 형태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언어도 디자인한다. 명칭 하나가 관계를 만들고, 호칭 하나가 인식을 바꾸고, 단어 하나가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이번 수원의 해프닝은 작은 사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과 브랜딩의 눈으로 보면 결코 작지 않다.
국가 브랜드는 시각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언어에서 시작된다.
북한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이건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품격의 국가로 보이길 원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국호도 브랜드다.
그리고 성숙한 브랜드는, 자신이 불편한 상대를 부를 때 더 품격이 드러난다.
글_ 정석원 편집주간
그림_ X4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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