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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정글 기획취재_ 을의 눈물 4] ‘지시’는 갑, ‘책임’은 을 - 프로젝트의 실패는 항상 용역 수행사의 몫인가

2025-08-25

“우리가 정한 방향이긴 한데, 왜 이렇게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초기 콘셉트랑 지금 결과가 너무 달라요.”
“결국은 당신들이 클라이언트 니즈를 잘못 이해한 거죠.”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용역을 수행해 본 디자인 회사라면 수없이 들어봤을 말이다.
이 말들의 공통점은, 과업 결과가 잘못돼도 책임은 언제나 용역수행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과업 지시는 클라이언트가 하고, 진행 방향도 클라이언트가 정한다.
하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용역수행사가 잘못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출발은 ‘갑’이 정하지만, 실패는 항상 ‘을’의 몫이 되는 업계의 잔혹한 공식이다.

 

과업 지시는 클라이언트가 하고, 진행 방향도 클라이언트가 정한다. 하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용역수행사가 잘못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그림: AI 생성)

 

 

 

처음에 그렇게 하라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브랜딩 전문회사 C사 사례가 그 전형이다.
한 지자체의 관광 BI 리뉴얼 과업에서, 담당 부서장은 “전통”과 “자연친화”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용역 수행사는 그에 맞춰 여러 단계의 중간 보고 과정을 거쳐 고즈넉한 이미지로 제법 만족할 만한 최종 디자인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최종 발표장에서 단체장이 불쑥 등장해 던진 말은, 모든 걸 뒤집었다.
“이건 너무 맘에 안드네요. 세련된 도시 느낌의 디자인안은 없나요?”

 

그 순간까지의 숱한 기획 단계와 디자인 개발 과정은 한순간에 쓰레기가 됐다.
부서장은 슬그머니 책임을 피했고, 실무자는 용역 수행사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뭐라도 다른 방향을 빨리 제안해 주세요. 여기서 멈출 수는 없잖아요.”

 

결국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다시 작업됐다.
물론 추가 비용은 당연히 없고, 지체상금 물지 않도록 납기 연장만 선심쓰듯 해줬다.

 

 

과업지시서 내용은 불완전한데, 용역 수행사는 완벽을 요구받는다

 

과업 방향에 대한 브리핑은 대개 애매하다. 때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그냥 요즘 느낌으로 해주세요.”
“젊고 감각적인 방향이면 좋겠습니다.”
“기존보다 나은 걸 기대합니다.”

 

이런 식의 막연한 말 몇 마디가 전부다.
용역 수행사는 클라이언트의 의도를 ‘추측’해야 하고, 그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또다시 비난을 받는다.

 

“왜 계속 디자인안이 이 모양이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랬습니까?”

 

클라이언트는 언제나 결과만 보고 심판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이 했던 말과 지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책임은 공유되지 않는다

 

프로젝트의 이상적인 구조는 클라이언트와 용역 수행사가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클라이언트는 과업 지시만 하고 뒤로 물러서며, 용역 수행사는 일방적인 집행자로만 취급된다.

 

클라이언트는 요구할 때는 군림하고, 책임질 때는 사라진다.
처음 용역 착수보고회 때는 웃으며 악수했던 클라이언트가, 결과가 불만족스러우면 가장 먼저 “이건 우리 뜻이 아니다”라며 손을 턴다.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용역 수행사의 몫이다. 계약 해지, 대금 감액, 블랙리스트 등으로 되돌아온다.

 

 

‘결과지상주의’라는 폭력

 

문제의 핵심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잔혹한 사고다.
애초에 방향을 잘못 제시한 건 클라이언트인데도, 최종 결과만을 근거로 용역수행사를 단죄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디자인 회사는 창작자가 아니라 ‘명령대로 찍어내는 단순 하청 용역회사’로 전락한다.
기획과 전략 수립은 이미 배제된 채, 클라이언트가 지시하는대로 색깔과 도형을 조합하는 기능적인 손끝만 요구받는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는 모든 비난을 뒤집어쓴다.

 

 

실패한 프로젝트에는 클라이언트의 책임도 크다

 

이제는 분명히 물어야 한다.
“이 과업에 대한 초기 브리핑은 충분했는가?”
“클라이언트는 프로젝트의 방향을 끝까지 책임졌는가?”
“용역 수행사는 전략적 파트너였는가, 단순 대행사였는가?”

 

프로젝트의 실패는 곧 과업 초기단계인 기획과 전략 수립의 실패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디자인 용역 생태계에서 클라이언트가 책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직 용역 수행사만이 희생양이 된다.

 

기획 단계부터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책임은 분산될 수 없다. 기획도, 결정도, 결과도 공동으로 이뤄졌다면 평가와 책임 역시 클라이언트와 용역 수행사가 함께 져야 한다.
이 단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한, 용역 수행사인 디자인 전문회사는 영원히 ‘을’로 남을 수밖에 없다.

 

기획취재_ 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gmail.com) / 최유진 편집장 (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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