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0
임우주 디자이너는 문화를 이끄는 디자인을 꿈꾼다.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넘어 ‘느낌’을 전하고자 한다. 기쁨, 슬픔, 환희 등의 감정을 전하며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디자인을 목표로 삼는 그녀의 이러한 생각의 바탕엔 뉴욕에서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뉴욕에서 임우주 디자이너는 그래픽 디자인에 요구되는 ‘공식’을 따르기보다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펼치며 자신 있게 본인의 디자인을 드러내고 있다.
임우주 디자이너
임우주 디자이너는 SVA(School of Visual Arts)를 졸업한 후 O.O.P.S(Office of Paul Sahre)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요커(New Yorker)> 등 세계적인 매거진의 디자인을 하고, 미국 밴드 데이 마이트 비 자이언트(They Might Be Giants)의 작업을 통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노미네이트되었던 그녀의 경험은 그녀에게 디자이너로서 또 다른 꿈을 그릴 수 있도록 했다.
디자인은 규칙이나 트렌드, 혹은 마케팅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닌, 문화가 동반될 때 비로소 지속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하는 임우주 디자이너는 O.O.P.S의 활동을 통해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해내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고 있다.
현재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 론칭하는 패션 브랜드의 전반적인 그래픽 디자인과 스타일링을 맡고 있다. 뉴욕, O.O.P.S에서의 디자인 경험을 통해 문화, 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임우주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임우주 디자이너
Q. 어떤 활동들을 해왔나.
SVA 졸업 후 O.O.P.S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O.O.P.S에서는 New York Times, the Atlantic, The Baffler 등의 일러스트 작업과 They Might Be Giants의 앨범 작업, PENGUIN BOOK, NEW DIRECTIONS publisher의 북 커버 등 다양한 작업을 했다.
Q. 어떻게 O.O.P.S에서 활동하게 됐나.
3학년 수업 때 O.O.P.S의 Principal인 Paul Sahre을 처음 만나게 됐다. 폴의 수업을 들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아마도 폴이 유니크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해 준 것 같다. 그 때의 인연으로 O.O.P.S에서 일을 하게 됐다.
Q. ‘새로운 관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풀의 수업방식은 독특했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 학교 주변을 걷고 오라고 한 후, 보고 느낀 것을 디자인하라는 식이다. 평범한 과제는 하나도 없었다. 개인이 가진 색과 잠재력을 꺼내 주려는 수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나에게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
한번은 ‘fountainhead’라는 책을 읽는 것이 숙제였다. 장편인데, 책에는 기존 건축 방식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축가인 주인공 하워드 로크가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폴이 그 책의 북커버를 만들라고 했고, 난 시멘트로 책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북커버가 아닌 시멘트를 선택했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폴에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Q. 폴은 어떤 디자이너인가.
폴은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디자이너이자, 리더이자, 맨토다.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이 탁월한데, 아주 사소한 차이로 새로운 시각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디자이너다.
폴은 디자인의 시각적인 요소를 작은 생각의 차이로 풀어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만이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폴의 디자인을 보면 느낌이 온다.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둘러보다가 폴의 색깔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 폴의 작업이었다.
Q. O.O.P.S의 분위기는 어떤가.
O.O.P.S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O.O.P.S엔 정해진 규칙이 없다. 모든 방법과 아이디어에 대해 오픈마인드다. 해보지 않은 것, 새로운 것, 재미있는 작업을 하려고 추구한다. 어떤 아이디어나 의견을 내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한(?) 아이디어를 내길 기대한다. 너무 큐레이션이 된 것보다 날것을 더 중요시한다. 특히, 스케치 단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규칙에 얽매이다 보면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Whole Universe Catalog 2097, Copyright: The Baffler, O.O.P.S
Q. O.O.P.S의 작업방식이 궁금하다.
클라이언트로부터 작업의뢰가 들어오면 아이디어 스케치를 한다. ‘Bring 50 ideas or more’와 같은 식이다. 이후 회의를 거쳐 그 중에서 5개 정도로 스케치를 추려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고, 실행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인 작업 방식은 매 작업마다 달라지지만, 컴퓨터 작업보다는 손으로 만드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능하면 직접 만들어보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래야 더 오리지널리티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Q. 이곳에서 했던 주요 활동에 대해 소개해준다면.
<The New York Times>, <New Yorker>, <The Baffler>, <The Atlantic> 등 미국의 언론, 매거진 등과 주로 일을 했고, 북커버 작업 및 브랜딩, 앨범 커버 작업 등을 했다.
‘They Might Be Giants’ 라는 미국 밴드와의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They Might Be Giants는 그래미 어워드를 2번이나 탔고, 미국과 유럽에 단단한 팬 층이 있다. 그들의 공연에서 쓰일 굿즈 도 만들고, 전반적인 BOOK Album(CD, LP, Package) 작업을 했는데, 이 작업이 그래미 어워즈 ‘Best Boxed or Special Limited Edition Package’ 카테고리에 노미니됐다.
Q. 어떤 작업이었나.
‘BOOK’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는데, 앨범 패키지를 12 by 12 책 형식으로 만들었다. 144 페이지 정도 되는 책 형태의 앨범인데, 곡과 앨범에 삽입된 사진과 어우러지도록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모두 다 다르게 디자인했다.
먼저 타자기로 옮기기 편하게 시스템을 만들어서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고, 그 다음 Courier, Olde English, Letter Gothic, Script, OCRr-A, Manifold, Symbol, Orator, Dual Gothic의 타입을 사용해 IBM Selectric III 타자기로 하나하나 옮기는 방식이었다.
BOOK, Copyright: They Might Be Giants, O.O.P.S
처음 알았다.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니 될 수 있다는 것을.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노미니만으로도 엄청난 경험이었다. 나에게 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작업이었다.
grammy nominee, Package BOOK
Q. O.O.P.S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넘어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한국과 뉴욕의 그래픽 디자인의 차이가 있다면 무어라 생각하나.
한국에서 일을 해본적이 없어서 비교는 힘들지만 한국의 디자인을 보면 화려한 색상, 타이포그래피의 조합, 그리고 브랜딩 중심의 디자인이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비주얼적으로는 강렬하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한 스타일이 반복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타이포그래피는 그래픽 디자인에서 중요한 요소다. 타이포그래피를 멋지게 사용하려면 장인정신이 있어야한다. 타이포그래피는 0.1pt로도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아이디어’와 ‘개인의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크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Braulio Amado, Erik Carter, Richard Turley 등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보면 각자 뚜렷한 개성과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뉴욕에는 있다. 그래픽 디자인을 단순한 상업적 도구가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다. 뉴욕에서는 클라이언트가 “이 디자이너와 꼭 함께 작업하고 싶다”며 협업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디자이너에 대한 존중도 높은 편인 것 같다.
뉴욕에서는 <뉴욕타임즈> 같은 주요 언론사가 매주 다양한 아티스트(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조각가, 사진가 등)와 협업해 기사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Bloomberg Businessweek>도 마찬가지다. 많은 매체들이 아트 부서에 투자를 하면서 비주얼 자체를 저널리즘의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거진을 제외하면 일반 언론사나 기업에서 ‘아트 부서’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여의도의 한 금융회사에서 아트 디렉션을 기반으로 한 매거진을 만든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한국의 주요 신문들을 볼 때 과거의 디자인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미국도 각 언론사의 성향과 허용 범위에 따라 스타일이 제한되긴 한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최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실험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런 디자인 방식 덕분에 단순히 신문이 아니라 하나의 아카이브이자 도시의 아이덴티티로 작용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뉴욕타임즈>와 작업할 때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를 가져가기도 했는데, 아트 디렉터들은 재미있게 봐주었다. 물론, 뉴욕 타임즈의 성향상 모든 아이디어가 수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실험들이 결국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How Bitcoin Can Immunize America From Cancel Culture, Copyright: The New York Times, O.O.P.S
Give Kids Right to Vote, Copyright: The New York Times, O.O.P.S
Anxiety About Wokeness Is Intellectual Weakness, Copyright: The New York Times, O.O.P.S
End of Imperial Presidency, Copyright: The New York Times, O.O.P.S
Q. 언론사, 매체가 하나의 ‘도시 아이텐티티’로 작용한다는 것이 새로우면서도 와 닿는다.
뉴욕이 부러운 이유 중 하나가 ‘뉴욕타임즈’라는 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뉴요커들에게도 <뉴욕타임즈>는 자부심이다. <뉴욕타임즈>는 단순한 정보만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뉴욕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뉴욕타임즈>는 <뉴욕타임즈>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를 고용해 일관성을 유지하며 디자인을 발전시켜 왔고 현재의 그리드 시스템, 타이포그래피, 컬러 등을 갖추게 됐다. 반면, 한국의 <중앙일보>는 몇 년 전 로고를 바꾸고, 영어로 변경했지만 그 변화가 문화적으로는 영향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외형적 변화만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와 시스템, 전반의 유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로고를 바꾸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떤 철학을 전달할 지에 대한 고민까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튼 글레이저의 [I❤NY] 로고가 오랫동안 뉴욕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 역시 그 로고가 뉴욕의 정체성과 문화를 변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뉴욕의 70년대는 어두운 시기였다. 마약과 폭력이 거리에 가득했고, 뉴욕은 위험한 도시라는 인식이 강했다. 예쁘기만 한 디자인은 금방 소비되고 잊히지만 문화와 연결된 디자인은 새로운 시각과 태도를 제시하기 때문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Q. 디자인 철학은 무엇인가.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트렌드나 마케팅으로만 소비되는 디자인은 지양한다.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서 문화가 동반될 때 디자인은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최근 ‘Charli XCX’의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디자이너(Imogene Strauss 외 다수)가 그래미 레코드 패키지상을 수상했다. 이 커버가 나왔을 때 미국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커버디자인이 ‘Brat(버릇없는 아이)’라는 앨범 제목처럼 정말 버릇없게(?) 디자인됐기 때문이다. 단어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stretched된 타입을 사용했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하지 말아야할 암묵적인 룰을 깬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면 ‘이게 디자인이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규칙을 깨는 아이디어가 반영된 것이다. 이 앨범커버는 문화를 만들었다. 많은 밈이 생겼고, 앨범에 사용된 색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연녹색)은 패션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는 아티스트와 그래픽 디자이너 모두 그래미 수상자가 됐다.
또다른 예로는 2016년 미국 대선 캠패인을 들 수 있다. 힐러리 캠페인의 아이덴티티 시스템은 디자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팬타그램에서 진행됐고, 트럼프 캠페인 Make American Great Again(MAGA HAT)은 디자인에 대한 교육이 없는 트럼프 본인에 의해서 탄생됐다. 이 모자 캠페인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패러디되며 오랜 기억에 남았다. 트럼프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 모자를 사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디자인의 타입페이스나 디자인 규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예라고 생각한다.
임우주 디자이너의 GIF 애니메이션 스틸 이미지, Active Red Bas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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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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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주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Q. 해외 무대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선 어떤 준비를 해야하나.
뉴욕에는 열린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색을 지키며 끊임없이 시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해외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도전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일하고 싶은 회사나 디자이너가 있다면 작업물과 함께 주기적으로 집요하게 연락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Q. 디자인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느낌(feeling: sad, happy 등의 감정)을 주고 싶다. ‘어떻게 보여지는가’보다 ‘어떤 느낌을 줄 것인가’를 고민한다. 밀튼 글레이저가 디자인한 [I❤NY]가 그랬던 것처럼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Q.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해내면서 디자인을 통해 문화, 예술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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