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4
전시의 도록이나 작가들의 작품집을 단순히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들의 영혼이 담긴 작품들의 모습을 담는 그것은 그 어떤 책보다도 잘 만들어져야 한다.
멋있는 결과물을 위해 과하게 디자인을 해서도, 편집자의 색을 빼기 위해 디자인을 덜어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작가의 작품 의도와 작업 철학을 전달하는 작품집을 만들 수 있을까.
디자인사강 BI 이미지
디자인사강은 주로 전시도록이나 작품집을 만든다. 디자인사강이 작업한 작품집의 가장 큰 특징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다.
디자인사강 주성수 대표
디자인사강의 주성수 대표는 23년간 작가들의 작품집을 만들어왔다. 작가만의 색과 감성이 살아있는 작품집을 제작해 온 주성수 대표로부터 디자인사강의 디자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어떻게 디자인사강을 설립하게 됐나.
기업 디자인팀에서 반복되는 상품 카탈로그 디자인 작업에 무료함을 느낄 즈음에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어요. 아는 포토그래퍼가 찍은 공예작가의 전시 리플릿을 진행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반응이 좋아서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작품집 의뢰가 이어졌죠. 아티스트의 작품이 나의 편집으로 다시 구성되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어요. 고정 클라이언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만의 스튜디오가 시작됐습니다.
Q. 주로 전시도록을 만드는 걸로 알고 있다. 도록 제작은 어떤 작업인가.
전시도록(혹은 작품집이라고도 합니다)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작가가그동안 작업한 작품을 전시로 세상에 알리는 것을 돕는 일이고, 또 하나는 작가 스스로에 대한 기록물이죠. 저는 도록을 디자인하면서 그동안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가의 시간과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성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에게는 ‘편집과 디자인’의 매력이 집중되는 작업입니다.
Q. ‘디자인사강’은 어떤 의미인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해서 거기에 ‘사(思), 강(江)’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대부분 강은 목적물이 아니잖아요. 흐르고 흘러 위대한 바다에 도착하는 역할이죠. 그 런데도 그 강이 지나며 만나는 곳은 문화가 번성하는 게 맘에 들었어요. 그래서 사강의 디자인과 만나는 작가나 기업이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름을 짓게 됐습니다. 우리는 또 흐르고 흘러 누군가를 만나고 하겠죠.
Q. 디자인 작업에 있어 특별한 철학이 있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무엇인가.
특별한 철학은 없습니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강의 디자인이 드러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제가 만난 작가의 작품, 클라이언트의 의도가 드러나는 게 저는 디자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눈에 띄는 그래픽 요소는 자제합니다. 그 요소가 클라이언트의 의도를 더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저는 그 정도의 그래픽을 표현할 능력은 부족해서 사족이거나 과잉으로 보일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디자인을 빼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그래픽을 잘하면 이런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래서 편집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그 작품의 이미지(주로 사진으로 표현되는)와 그것을 설명하는 텍스트(서문뿐 아니라 작은 캡션까지)의 폰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미지를 구성하고 텍스트를 배치하는 레이아웃이 제가 좋아하는 작업입니다.
Q. 주로 어디서 디자인의 영감을 받나.
그건 저도 정말 모르는 순간들입니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봤던 다르덴 형제의 영화 <더 차일드>의 먹먹함일 수도 있고, 모마미술관에서 봤던 잭슨 폴락의 <No. 31>의 자유로움일 수도 있고, 초등학교 4학년쯤 읽었던 <소공자>의 화려한 양장 제본일 수도 있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옥 같은 대사일 수도 있으며, god의 <거짓말>이거나, 사랑하는 가족과 어제 저녁에 먹은 된장찌개일 수도, 아니면 유년시절 남산공원의 비둘기 무리일 수도 있겠죠. 내 안에 기록된 기억과 감성이 어떤 콘텐츠를 만나면서 이렇게 편집하고 표현하면 좋겠다고 나올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디자인은 ‘경험의 유산’일 수도 있겠네요.
'212121' 전시 포스터 이미지
<212121>
Q. 2021년엔 도록을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전시에 대해 소개해달라.
처음 컨셉은 ‘전시도록을 전시하다’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전시 공간도, 작품도, 관객도 다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기록물’인 전시도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죠. 오래전부터 기획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그 컨셉과 2021년이 만나게 됐습니다. 2021년 10월 한 달 동안 디자인하우스의 후원으로 모이소갤러리에서 진행했는데, 이 시대에 책을 만드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출판인의 입장에서 공감해 주셔서 그런 좋은 기회가 주어진 거 같아요.
전시 ‘212121’은 ‘2021년에 21명의 작가와 21세의 사강을 기록하다’라는 주제로 그동안 작업한 공예작품집 중에서 저에게 영감을 주었던 20점과 그 작품집에 실렸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공예와 디자인’이 어우러진 전시가 됐습니다. 또한 작가와의 인터뷰를 포함해 그 과정을 엮은 디자인사강의 전시도록 <212121>까지 출판하게 됐습니다. 일이 커졌죠(웃음).
Q. 전시에 대한 계획이 또 있나.
무엇인가 계속 쌓이다 보면 언젠가 펼칠 기회가 생기는 것 같아요. ‘212121’을 통해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재미를 맛보았으니,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규모나 기간에 상관없이 관심 있는 공예나 사진, 영화, 문학 등의 콘텐츠와 사강의 편집이 만나는 전시는 계속 진행할 듯합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예가 김재영>
Q. 올해가 23년째이다. 긴 시간인데, 그동안 진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두 가지입니다. 작품집으로는 2013년에 출판한 <공예가 김재영>입니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그리고 공예가로 살아오신 김재영 선생님(숙명여자대학 공예과)의 은퇴를 기념해 만든 작품집인데, 처음에는 작가가 간단한 리플릿 정도를 의뢰했는데, 오랫동안 그분의 작품을 보아온 저로서는 그 기록을 모두 담고 싶어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모으고, 해체하고 구성하는 편집의 묘미를 제대로 느낀 작업입니다.
무엇보다 평소 선생님을 흠모하는 제자들의 열띤 후원으로 좀 더 풍성하고 격이 있는 도록으로 제작하게 돼 지금도 사강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처음의 떨림이 오래되면 이게 맞나를 고민하는데, 그런 매너리즘에 빠질 무렵 ‘편집의 힘’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프로젝트였고, 그 증명이 지금껏 디자인사강을 흐르게 하는 구심점이 됐습니다.
<이것은 파본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은 파본입니다 note project>입니다. 2015년, 한 미술관 전시도록 제작 중 5천장이 넘는 전지의 한쪽면을 인쇄한 후에 종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황급히 다른 종이로 인쇄를 마치고 수습한 후에 사고가 난 종이는 폐지 수거하는 어르신에게 드리고자 했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차 없이는 운반도 힘들고, 가져간다 해도 받을 수 있는 금액은 겨우 이만 원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한쪽 면은 쓸 수 있으니 노트를 만들어 판매하고, 수익금으로 선물을 전하는 디자인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표지에도 ‘이것은 파본입니다’라고 제목을 달아 놓고, 페이스북을 통해 제작한 200권이 다 팔려서 추운 겨울에 폐지 수거하는 어르신들께 따뜻한 옷과 머플러를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실수로 시작하게 됐지만, 오히려 디자이너로서 자부심이 생긴 프로젝트였습니다.
<유어시티_ 뉴욕>
<유어시티_ 훗카이도>
Q. 현재 진행 중인 특별한 프로젝트가 있나.
2022년 텀블벅으로 진행한 <유어시티 사진집> 시리즈 2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유어시티’는 전문사진작가가 아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를 담은 사진집입니다. SNS의 확장으로 모바일이든지, 카메라든지 다양한 도구로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아졌는데, 대부분 그 사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콘텐츠를 디자인사강의 편집과 디자인으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거죠.
<유어시티 사진집>은 도시의 사진과 그곳에서 느낀 감정과 기억을 표현한 글로 구성했기에 단순한 여행 가이드는 아닙니다. 시즌1에서는 건축가, 셰프, 목사 등의 다양한 직업군으로 뉴욕, 북해도, 제주 등의 도시를 구성했고, 이번 시리즈 2도 다양한 직업군과 새로운 도시로 구성할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콘텐츠가 on/off로 가볍게 인식되는 이 시대에 ‘소장하고 싶은 책’을 만들고자 디자인과 인쇄, 제본에 이르는 제작에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강병인의 글씨 모음집>
Q. 최근 강병인 글씨책을 만들고 펀딩까지 추진했는데, 성공이라고 자평하나. 앞으로도 이런 방법을 계속 도입할 계획이 있나.
아시겠지만 책을 만드는 일은 여러가지 고민(혹은 걱정)이 발생하는 작업입니다. 우선 벌목하고 화학적 처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펄프를 사용할 정도로 책이 가치 있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고, 그렇게 만들었는데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고 구매로까지 이를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콘텐츠인가도 고민이 됩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는가 등 새로운 콘텐츠를 만날 때마다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특히 디자인사강이 만드는 책들은 예술서적이 많다 보니 대중적이지도 않고, 잘 팔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책을 만들고 싶은 나의 욕망을 보상받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닌가를 고민할 즈음 <강병인의 글씨묶음집>을 만나게 됐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강병인의 글씨’는 단순히 유행처럼 번지는 멋진 장식의 캘리그라피가 아니라, 오랫동안 한글을 사랑하고 연구해온 한 작가의 ‘고민의 시간’이 담긴 작품집입니다. 그래서 디자인사강도 가볍게 접근하지 않았고, 기획과 작업까지 일년 정도 걸렸습니다. 이게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인지는 모르겠어요.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세간의 이목이 쏠린 것도 아니며, 저희에게 부를 가져다준 것은 더더욱 아니니까요. 그러나 작가의 작품집을 기다려 온 분들이 펀딩에 참여해 진행 과정부터 출판까지 함께했다는 뿌듯함을 공유한 것이 ‘성공’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면 좋겠네요.
그래서 이 펀딩 방법으로 제작비를 걱정하는 다양한 작업군의 아티스트들과 디자인사강이 만나 출판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유어시티_ 제주>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느날 아침에 주문이 들어온 <유어시티 07. 제주>의 택배포장을 하면서 ‘이렇게 책을 만들어 한두 권씩 팔면서 소소하게 나이 들어도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워낙 계획적이지 않고 비전을 생각하지 않다보니 다행히 지금까지 디자인하는 게 아닌가도 싶어요.
우선 6월 14일부터 18일까지코엑스에서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 책마을 부스’에 참가합니다. 처음 참가하는 행사라 아마도 부족하겠지만 ‘계속 디자인하고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디자인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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