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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인터뷰

애니메이션의 뼈대를 만드는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임희정

2022-06-28

한 편의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협업으로 완성이 된다. 그만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인데, 대본을 바탕으로 작업이 시작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세부적인 작업들이 이루어진다. 

 

먼저 대본이 만들어지면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수백 장의 패널을 그리며 연출을 시각화한다. 인물, 인물의 감정, 빛, 레이아웃 등이 모여 비로소 한 장의 애니메틱(스토리보드에 음향효과를 입힌 영상물로, 완성된 애니메이션보다는 간결하지만 제작에 필요한 정보를 되도록 많이 포함한 작업물)이 완성되고, 본격적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임희정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이 중 스토리보드 작업은 애니메이션 작업의 뼈대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임희정 아티스트는 현재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프로젝트에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임희정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부터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되기까지의 과정,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서 하는 일과 역할에 대해 들어본다. 

 

안녕하세요. 먼저 본인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현재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찰리와 초콜렛 공장> 미니시리즈 프로젝트에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임희정이라고 합니다. 

 

예전엔 어떤 활동들을 하셨나요?


그전에는 넷플릭스의 공개되지 않은 신작 프로젝트에서 에피소드 감독으로 일했습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드래곤 길들이기> 티비 시리즈, <스피릿: 언태임드>에 참여했고, 공식 크레딧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소니픽쳐스의 <미첼가족과 기계전쟁>에도 짧게나마 참여할 수 있었어요. 워너 브라더스 애니메이션에서 <DC 슈퍼히어로 걸즈> 리부트와 아마존 프라임 시리즈인 <로스트 인 오즈>에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도 참여했습니다.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는 어떤 일을 하나요?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는 애니메이션 파이프라인에서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팀에 속합니다. 대본 작가들이 대본작업을 마쳤을 때 보드 아티스트들이 페이지들을 분배 받아 연출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대략3주에서 8주 정도의 기간 동안 적게는 수십 장, 많게는 수백 장의 패널을 그리게 됩니다. 

 

연출은 물론 라이팅(lighting)이나 배경 레이아웃, 인물 감정표현 등 꼭 필요한 정보들이 스토리보드 패널에 담기게 되고, 이 패널들은 이후 편집을 거쳐 애니메틱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후 본격적으로 레이아웃이나 애니메이션 팀 등 포스트 프로덕션(post- production)팀에서 참고하는 블루프린트가 됩니다.

 

에피소드 감독이란 특별히 북미의 TV애니메이션 파이프라인에서 생겨난 역할인데요(극장용 애니메이션에는 이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스토리보드 패널들을 한데 모아 피드백을 제공하고, 이를 ‘스토리보드 리비져니스트(Revisionist)’라고 불리는 보드 수정 팀원들에게 분배 후, 피드백이 반영된 패널들을 재취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친 스토리보드들을 애니메이션 편집자, 에디터들과 함께 애니매틱으로 만드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디렉터’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때그때 한 개에서 두 개정도의 에피소드를 맡아서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중간 관리자로서 애니메이션 제작 결정권을 가진 다른 관리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일의 과정 중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요?


스토리보드 작업을 10여 년간 해왔는데요, 그 시간동안 한결같이 어려웠던 것은 스케줄 관리인 것 같아요. 말씀드린 것처럼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는 작업을 시작할 때 꽤 넉넉한 기한을 받게 됩니다. 보통 분배 받은 작업을 다른 작업자들과 나누지 않고 혼자 일하게 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마감 기한이 가까워졌을 때 벼락치기를 하게 되는데, 하루 이틀 동안 몇 백장의 보드를 그리는 기행을 벌이게 될 때도 있습니다. 

 

나름 프로 의식을 가지고 일하고 있지만 분배 받은 장면이 중요하고 어려운 경우 참고자료를 모으고, 장면을 머릿속으로 수백 번 그려보다 보면 예정했던 것보다 하루 이틀을 더 소비하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캔버스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고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스토리보드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래도 글이었던 상태에서 최초로 그림으로 표현되는 썸네일(thumbnail)을 제작하는 일 인 듯합니다(제 개인적인 과정으로, 이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보드 제작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비록 저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인 경우가 대부분 이어도 저는 글을 읽었을 때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이미지를 본능적으로 믿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 썸네일이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의 원초적인 형태이고, 분배 받은 대본의 내용들을 모두 썸네일의 형태로 정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릿> 스토리보드 작업 과정. 썸네일을 바탕으로 완성된 스토리보드

 


스토리보드의 구도등이 그대로 구현된 완성 애니메이션

 

 

가장 보람을 느끼실 때는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제가 스토리보드로 연출한 장면이 완성된 애니메이션에 그대로 담길 때 최고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 작업자들의 손길을 거쳐 제 스토리보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도, 제 연출 의도만큼은 결과물에 살아 숨쉬고 있을 때 ‘내가 이래서 이 일을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해오신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우선 현재 저는 넷플릭스의 <찰리와 초콜렛 공장>팀에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재직 중인데요, 현재 이 프로젝트는 타이카 와이티티(Taika Waititi) 씨를 파일럿 에피소드 감독 및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앞세워 리미티드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총괄 감독은 오랜 시간 디즈니에서 일해온 폴 브리그스(Paul Briggs) 씨가 맡고 있고요. 

 

공개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여태껏 수많은 버전이 만들어졌던 유명한 원작이다 보니 모두가 ‘이번엔 뭔가 색다르고 더 멋진 것을 만들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공개된 작품으로는 드림웍스의 <스피릿 Spirit : Untamed>(2021)라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있는데요, 이 작품은 2002년 제작된 <Spirit: Stallion of the Cimarron>이라는, 동명의 영화의 리부트 버젼입니다. 스피릿이라는 야생마가 똑같이 등장하는, 멀티버스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가상의 옛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당찬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이 스피릿을 비롯한 두 마리의 말들과 힘을 합쳐 야생마 떼를 현상수배가 걸린 악당들로부터 구해내 야생으로 돌려보낸다는 줄거리인데, 제게는 예전에 <드래곤 길들이기> TV 시리즈에서 같이 일했던 감독님과 다시 합을 맞추는 기회였기 때문에 더 각별했고,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이기에 더 신나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이전에도 저는 로렌 파우스트(Lauren Faust)의DC 수퍼히어로 걸즈, 미첼가족과 기계전쟁, 로스트 인 오즈 등 여성 캐릭터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에 많이 참여했어요.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제가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많은 작품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 많아요. 남성 캐릭터들이 주인공인 멋지고 재미있는 작품이 많은 만큼, 여성 주인공의 애니메이션도 많아지고 있어 기쁘고, 앞으로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피릿> 스토리보드와 애니메이션 비교샷
  


공부를 하셨던 과정과 입사 과정이 궁금해요. 


저와 사정이 비슷한 분들이 분명 계실 것 같은데요. 저는 그림과 애니메이션, 서브컬처 문화를 좋아하지만 그 분야를 장래 희망으로 삼기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심했던 가정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겨우 특정 대학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미술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츠(칼아츠,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 합격했지만 미술 기본기도, 애니메이션에 대한 실무적인 지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그 분야 최고의 대학에 간다고 그 곳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100퍼센트 흡수하기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목표 없이 커리큘럼을 따라 갔고, 처음엔 모두가 선망하는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그 분야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죠. 

 

여러 기업이 학생들의 작품들을 보고 피드백과 더 나아가 취업 기회를 제공하는 포트폴리오 데이(Portfolio Day) 이벤트에 그 포트폴리오를 들고 가니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방문한 아티스트들이 ‘스토리보드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평생 선망하던 기업의 아티스트들의 조언이었던 지라 스토리보드를 좀더 공부하고 따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제가 한 가지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걸 잘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고, 그런 면에서 러프한 페이지를 여러 장 그리는 스토리보드가 제 성향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듬해에는 픽사 애니메이션에 스토리 인턴으로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4년간 학교에서 배웠던 것이 무색하게 한번 회사에서 일하니 눈이 번쩍 뜨이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픽사 스튜디오에서 배웠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에는 드림웍스 TV의 <드래곤 길들이기> TV 쇼에 스토리보드 리비져니스트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같은 프로젝트에서 승진해 비로소 정식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일하게 됐고, 이곳에서 생긴 실무 포트폴리오를 어필해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식으로 경력이 이어지게 됐습니다. 애니메이션 업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좁기 때문에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서로 프로젝트로 불러오는 식으로도 새로운 곳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외국인 신분의 한계로 저는 한국에 돌아가게 됐어요. 비자가 만료돼 더 이상 미국에서 일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에요. 저는 경력이 짧았던지라 당시에는 가장 보편적인 H1B 비자로 저를 고용하려는 회사도 없었고, 뛰어난 능력을 증명해야하는 아티스트 O-1 비자를 신청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한국에서 보드 프리랜스를 하다가 결국 다시 미국의 한 작은 대학원에 입학해 장학금과 프리랜스로 경력을 쌓았는데, 너무 작은 학교이다보니 제가 졸업할 때쯤 되니 파산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이때는 제 경력이 O-1비자를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당시 프리랜스를 하고 있던 워너브라더스에서 비자를 스폰서 받아 DC 수퍼 히어로 걸스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받은 비자로 지금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드를 동화구연 식으로 발표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 말하기(public speech)능력과 자신감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소양이었는데, 이게 외국인에다 내향인에 가까운 제게 정말 어려운 부분이어서 좌절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 부분은 결국 10년이라는 시간에 천천히 단련돼, 현재도 발표를 빼어나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스토리보드가 나 대신 말해주니 괜찮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더군요.

 

DC <수퍼히어로 걸즈> 메인 오프닝 타이틀 스토리보드 작업

 

 

애니메이션 관련 일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거나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기본적으로 그림실력이 월등한 경우가 많으시더라고요. 스토리보드가 연출이긴 하지만 연출은 배워가는 것이며 결국 그림실력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혹시 그림 이외의 다른 요소들 때문에 본인은 안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좀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취직할 당시에는 비자를 얻기 위해서라도 유학이 거의 필수였는데, 질 좋은 온라인 강의가 많고 SNS를 통한 취업이 비교적 보편적이 된 현재에는 외국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창구도 훨씬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북미에서 일하고 싶으시다면 영어로 의사소통은 가능하셔야겠지만, 그 외에는 본인의 실력을 믿고 좋아하는 일을 하시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시던 위치에 당도해 계실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스토리보드 작업도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감독으로서의 경력도 더 많이 쌓아보고 싶습니다. 보드작업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혼자 일하기보다 여러 다른 부서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를 통해 더 작품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나아가 결과물에 제 자신의 색깔을 더 많이 담을 수도 있는 것 같고요. 

 

애니메이션 작업과 별개로 한국 웹툰의 콘티 작업도 언젠가 해보고 싶습니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임희정(heejungnim@gmail.com, 인스타그램 Heejungnim, 트위터 heejung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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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보드 #스토리보드아티스트 #애니메이션 #임희정 

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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