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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스토리⨉디자인] ‘함께 식사하기’에 담긴 스토리

2021-06-30

미술가 다니엘 스푀리는 끼니를 위해 매일 차리고 치우는 상차리기 의례 속에는 때론 사소하고 때론 기억에 남는 스토리가 간직돼 있다고 말한다. ‘세상만사가 우연이지만,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한 아리송한 그의 진술은 식사가 끝나고 난 식탁 위 남겨진 빈 식기들과 음식 찌꺼기는 이들을 남긴 여러 수많은 사물들과 인간의 활동들이 빚어낸 자잘한 흔적이자 물리적 기록이라는 메시지의 시적 압축이다.

 


다니엘 스푀리(Daniel Spoerri), <방, 제13번(Chambre No 13)>, 1998년. Fondazione Il Giardino di Daniel Spoerri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Photo ⓒ Susanne Neumann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봉쇄 조치로 2020년 봄부터 전면 휴관에 들어갔던 유럽의 문화기관들이 5월 말부터 재개관한 가운데, 비엔나 쿤스트포룸(Bank Austria Kunstforum)은 20세기 근대미술의 목격자 다니엘 스푀리가 지난 70년 동안 작업해 온 그의 대표작과 미발표작 약 100편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정리한 대규모 개인 회고전(2021.3.24~6.27)을 열었다.

 

루마니아 태생의 스위스 미술가 다니엘 스푀리(Daniel Sperri, 1930~)는 올해 91세를 맞았다. 그가 졸수(卒壽)를 기념한 작년 2020년, 유럽인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공공 공간 폐쇄와 출입제한이라는 강력 방역조치를 경험했다. 언제나 낯익은 주인과 이웃을 만날 수 있고 담소할 수 있는 제3의 공간들 - 동네 주점, 바, 식당, 극장, 미용실 등 -에 대한 출입 금지는 사회적 감금에 다름없는 어둡고 외로운 긴 터널이었다.

 


<셀프서비스 레스토랑에서의 조식상(Frühstückstablett, Selbstbedienungsrestaurant)>, 1966년, 파리. 소장: Kunstpalast, Düsseldorf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Photo ⓒ Kunstpalast - Horst Kolberg - ARTOTHEK

 

 

텅 빈 식당은 보기에 안쓰럽고, 현대인은 혼자 식사한다. 손님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식당 주인과 웨이터는 식당에 들어온 손님의 마음을 애석하게 만들고, 홀로 먹는 식객의 모습에는 왠지 모를 애상이 풍겨 나온다. ‘불가피하게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먹는 동작 중간중간 휴식 간격을 조절하고 뭔가 바라보기 좋은 눈요깃거리 대상을 찾으라’는 한 쪽의 서양식 레스토랑 매너 지침은 레스토랑에서 독상(獨床)하기의 어색함과 외로움에 대한 본질적 응축이다.

 


<Restaurant de la City-Galerie> 타블로 피에주, 1965년. Friedrich Christian Flick Collection im Hamburger Bahnhof, Berlin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Photo: Stefan Rötheli, Zürich

 

 

미술가 다니엘 스푀리가 좋은 사람들 여럿이 모여 식욕 넘치고 유쾌하게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시는 공동체적 의례(ritual)를 인생 모험이자 궁극적인 생(生)의 낙이라 믿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음식은 먹어서 좋고 또 먹으면서 생각하게 해줘서 좋다’고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말했다.

 


고전적 화가 수업을 받지 않아 드로잉 실력이 부족해서 갖가지 일상품을 접착제로 벽에 부착하는 레디메이드 ‘아상블라주’ 기법을 착상했다. <Restaurant de la City Galerie> 1965년. 소장: Bischofberger Collection, Männedorf-Zurich, Switzerland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제2차 대전과 함께 그가 태어난 루마니아에서 어머니의 고향 스위스로 이주한 그는 스무살 젊은 에너지와 정처 없는 영혼을 다스리고자 무용수로서 예술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발레 무용수로 일하면서 틈틈이 전위적 예술잡지를 편집하고 시를 쓰며 예술을 불태우던 어느 날, 파리 여행길에서 조각가 알베르토 쟈코메티의 아텔리에를 방문해 전위미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식탁 위 먹고 남은 음식거리와 널브러진 식기가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착상에 도달했다.

 

1961년 아디 쾹케 화랑(Galerie Aldi Koepke)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관객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식료품을 판매한 <식료품 가게(Der Krämerladen)> 퍼포먼스는 음식거리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결합된 스푀리의 상황미술(situation art) 혹은 ‘우연의 미술’의 시초다. 평범하고 진부한 식료품을 시장가격과 같은 가격에 파는 단순한 행위에 불과하지만 예술이라 ‘지칭’하는 순간 더 맛있고 더 진귀한 미술품으로 변신하는 미술시장 메커니즘은 그를 매료시켰다.

 

1960년 독일에서 누보 레알리스트 운동이라는 예술동인을 결성한 후 뒤셀도르프 브르크플라츠 광장에 레스토랑 스푀리라는 식당을 개업해 동료 예술가들을 초대해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예술했다. <레스토랑 스푀리에서의 타블로 피에주(Tableau Piège, Restaurant Spoerri)>, 1972년. 소장: Bündner Kunstmuseum Chur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Photo: Bündner Kunstmuseum Chur

 

 

플럭서스 국제 전위예술의 유행을 타고 1963년 그는 파리 갤러리 J(Galerie J)에서 연 2주 동안의 개인전을 레스토랑으로 전환했다. 관객에게 음식을 요리해 대접하고, 미술평론가들이 웨이터로 서빙하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미술은 레스토랑으로, 레스토랑은 미술로 공간과 기능의 경계가 허물렸다. 관객들의 식사가 끝난 식탁 위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한 ‘타블로 페에쥬(tableau piège)’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타블로 피에주 - 세비야 시리즈 제16번 (Tableau piège – Sevilla Serie Nr. 16)>, 1991년.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Krakow MOCAK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Photo: MOCAK Collection, photo: R. Sosin

 

 

스푀리는 갖가지 일상품을 접착제로 벽에 부착하는 ‘레디메이드’ ‘아상블라쥬’가 완성된 때는 그가 스푀리 레스토랑이라는 식당을 개업하면서부터였다. 손님들이 식탁에서 식사하는 동안 벌어지는 식탁 위 식기와 사물들의 위치 변화, 음식과 음료가 소비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순간순간 기록한 사진 스냅이나 또 드물게 식사계산서에 1천 도이치마크(오늘날 기준 환산하면 미화 600 달러 가량) 더 내면 식사가 끝나고 난 식탁을 통째로 손님에게 판매하는 이벤트로 손님들에게 독특한 체험을 제공하는 ‘우연’의 ‘이트 아트(Eat Art)’라 이름 붙였다.

 

굳이 ‘음식의 도덕적 영향에 대해 알고 있는가?’라고 의문을 던졌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들어 음식과 함께 식사하기의 미덕을 파고들 필요도 없이, 보기 좋고 먹음직스럽게 잘 차려진 식사 상도 아니고 지저분하고 텅 빈 식기와 소비되지 않고 남겨진 음식 쪼가리가 널브러진 식사 후 식탁 풍경을 통해서 스푀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모든 사물은 저마다 할 이야기를 지녔다. 그래서 그는 레스토랑에 버금가게 벼룩시장을 좋아한다. <비엔나의 벼룩시장 제26번 (#26 Flohmarkt Wien)>, 2016년 4월, 2016년. 개인 소장. ⓒ Daniel Spoerri und Bildrecht, Wien 2021. Photo: ⓒ the artist and Galerie Krinzinger

 

 

거나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식탁 위에 널브러진 빈 술병, 지저분한 접시, 커피 컵, 냅킨, 담배꽁초로 그득한 재떨이를 바라보는 식객들의 배는 부르고 기분은 유쾌하다. 죽음이라는 숙명의 순간이 오기까지 생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사에 대한 시적 은유일까? 계산서라는 결과의 순간이 오기까지 식객들은 커피나 마무리 술을 핑계 삼아 식후 대화를 이어가지만 빈 식기와 더러워진 식탁보와 냅킨이라는 순간의 흔적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난다. 

 

글_ 박진아 객원편집위원
이미지 제공_ Images courtesy: Bank Austria Kunstforum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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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칼럼니스트
미술평론가, 디자인 및 IT 경제 트렌드 평론가, 번역가이다. 뉴스위크 한국판, 월간디자인의 기자를 지냈고,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뉴욕 모마,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미술관 전시 연구기획을 했다. 현재 미술 및 디자인 웹사이트 jinapark.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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