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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디자인의 폐허 1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 2015-07-22


‘냉전 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평적 의문과 전복의 제스처를 통해 무엇을 성취했는가?’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모더니즘은 재현 회화의 죽음을 선언하는 아방가르드 추상미술운동의 형태로 본격화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니멀리즘의 완성과 함께 모더니즘의 죽음(추상미술운동의 종말)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며, 기호로 해석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마구 소환하고 해체-(재)구성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와 유사하게 현대디자인의 역사에서 모더니즘은 장식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기능주의 디자인 운동의 형태로 출발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기업과 탈식민 국가 정부를 클라이언트로 삼은 모더니스트 디자이너들의 방법론적 한계와 자기 참조적 조형 언어의 폐해를 비판하며, 오래도록 망각됐던 역사적 양식과 장식들을 유희적으로 소환하고 해체-(재)구성하며 나타났다.

글 |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2차 대전 이후 미술과 디자인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지만, 전후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궤적은 상당히 비슷했고, 양자를 연결하는 고리의 역할은 미술계와 디자인계 모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던, 시대의 의제 설정자로 기능하는 몇몇 스타 건축가들이 맡았다. 전후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은 서로 등을 돌린 배다른 형제처럼 뵀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유사 동형성은 사라지지 않고 장기지속하며 동종의 변곡점을 그려왔다.

그리고 현대미술계와 현대디자인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적 비평 효과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소멸됐다. 오늘날 절대다수 디자이너와 미술가들이 서로의 세계를 잘 모르고 또 이해를 도모할 의지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동시 변조는 참으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종말과 함께 펼쳐진 것은 초납작한 세계다. 상하고저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무시간성의 정크스페이스 폐허.)
 

 

모더니즘의 죽음을 노래해 온 포스트모더니즘이 죽다

아무튼 1970년대 중반 본격 발흥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이었으니, 그 번영의 시기가 결코 짧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편의상 1975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종언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식이 현대미술가들에게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과 달리, 현대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죽음은 거의 인구에 회자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이후 본격화한 기대 감소의 시대에서 전문직능의 위기는 디자인계 쪽, 특히 3D(구제품/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화이트큐브의 활동이 중심인 미술가에게는 세상 변화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는 일 자체가 직업이고 또 그를 실현할 기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장에 연루된 현업 실무 활동이 중요한 디자이너에게는 세상 변화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는 일은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되기 쉽다. (그래서 북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이 거셌던 1980년대 초중반이나 국내에서 그 바람이 이어졌던 1990년대 초중반, 디자인 현업 다수의 종사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가는 몹쓸 유행으로 간주했더랬다.) 현업에서 일거리를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위상과 체면도) 잃은 디자이너에게 대안적 실험을 시도할 기회가 제공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구식 디자인 교육을 받은 채 사회에 과잉 공급되고 있는 청년 디자이너들은 시장에서 전문가 대접을 못 받고 일거리를 찾아 부유한다.
 

위 사진 설명: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와 동료 건축가들이 여섯 개의 기둥으로 구현한 지붕은, 높이 30미터에 폭이 208미터 길이가 292미터였다. 일본의 아방가르드 건축운동 메타볼리즘은, 도시를 뒤덮는 인공 지붕의 구조체에 이러저러한 유닛을 플러그-인함으로써 메타-도시의 질서를 구현한다는 망상을 워킹-모델로 제시했다. 당시 <타임>지는 “일본처럼 미래에 독점 사업권(프랜차이즈)을 강력 행사하는 나라는 없다”고 선언했다. 지붕을 뚫고 솟은 높이 70미터의 거대조각상은 현대미술가 오카모토 다로(岡本太郎, 1911~1996)의 <태양의 탑(太陽の塔)>.


시대의 변화로 인해 전문직능의 위기가 도래하면 전문가 사회가 그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디자인계에서 그런 담론적 구심점 노릇을 하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지구 상 어느 디자인미술관도 주요 현대미술관이 미술가에게 행해온 절대적인 영향력을 획득/구현해본 바 없고, 또 그처럼 첨예한 비평의 공론장으로 기능해본 적도 없다. 또 미술가들에게 베풀어지는 스튜디오 거주 프로그램이나 신작 창작을 추동하는 경쟁적 시상 제도는 여간해서 디자인계에 도입-정착되지 못한다. (오래도록 국내외 디자인계 유일한 공론장은 디자인계의 특유의 업계지였다. 인터넷과 스마트 기술의 보급 이후, 유서 깊은 디자인 잡지들은 왕년의 구심점 기능을 상실했다. 예컨대 <월간 디자인>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업계지였다.

지금은? 디자이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 비유하자면, <디자인이 가득한 스튜디오>라고 봐도 무방하다. 적잖은 돈을 벌어 시대의 총아로 승승장구하는 디자이너는 이제 지면에서 찾아볼 수 없다.)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에서 열린 포스트모더니즘의 조용한 장례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1년, 아주 적절한 시점에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역사를 결산하는 미술관 전시가 열렸다.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에서 열린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과 전복, 1970~1990(Postmodernism: Style and Subversion, 1970~1990)>가 그것. 디자인계 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총괄 결산해 비평적으로 회고한 이 전시는 두루 호평받았지만, 디자인 실무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이와 달리 주요 현대미술관의 기념비적 전시는 미술가들의 창작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곤 한다. 작가들에게 미술관은 실재계이기 때문.)
 

무시간성을 특징으로 하는 2010년대 중반의 오늘, 대학에서 미술과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언 이후’를 설명하는 일은 일종의 고역이다. 청년의 입장에서 모더니즘을 본 적이 거의 없으니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어렵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야기된 것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시대별 자료를 본다 한들 오늘의 무시간성 때문에 과거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감지하고 표지하기 어려우니 머릿속에서 온갖 과거 정보가 정보적 가치를 상실한 채 부유하며 역사적 시야를 흐리기 일쑤다. 결과는 판단력의 저하.

디자인계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하나는 냉전 시대의 성기 포스트모더니즘, 즉 1968년 프랑스학생혁명,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과 페미니즘혁명, 1969년 스톤월게이폭동, 1968~1969년 일본 전학공투회의 투쟁 이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의 1989년까지가 1차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또 다른 하나는 탈냉전 시대의 성찰적 포스트모더니즘, 즉 소비에트가 붕괴한 1991년 12월 이후부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까지가 2차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후자의 주역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탈냉전 시대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획은 그 골자를 유지했다.)


냉전 시대를 누린 성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성립 과정

간단하게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냉전 시대의 성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엄정한 이성중심주의적 방법론을 부정하고 해체함으로써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발전적 세계관에 이의를 제기하는 양식의 조형 질서를 이종 현실로서 즉각 구현해버리는 쾌락주의적 전략이자 실천이었다. 모더니즘에 의문을 제기하는 형태의 디자인 실천을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건축가들이었다. 1968년 프랑스학생혁명을 전후로 후기 구조주의 철학이 대두했을 당시 새로운 멘털리티가 형성됐다.

가장 먼저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으로 건축의 지역성을 탐구한 이들은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Robert Venturi, 1925~), 드니스 스콧 브라운(Denise Scott Brown, 1931~)이었다. 1966년, 1968년 라스베이거스의 버내큘러(vernacular) 건축을 인류학/기호학의 시선으로 탐구함으로써 모더니스트 건축의 궤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은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건축적 형태의 망각된 상징주의(Learning from Las Vegas: the Forgotten Symbolism of Architectural Form)>(1972[1977년 개작])에서 ‘실제 도시 공간의 조사·연구를 통한 알리바이 확보’란 효과적 전략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의 작업에서는 모더니즘 건축에서 금기시된 역사적 모티프와 지역적 양식을 전유(appropriate)하는 수준의 절충주의 조형-분류하기에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말기 모더니즘(Late Modernism)으로 볼 수도 있는-을 실험했을 뿐이다. 여타 경쟁자들의 정신분열적 조형 실험에 비하면 퍽 음전했다.)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1917~2007)도 1960년대에 현장 조사연구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발견했다. 그는 1961년 문학 번역자이자 평론가였던 첫 부인 페르난다 피바노(Fernanda Pivano, 1917~2009)와 함께 인도를 여행하며 새로운 현존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을 했고, 그를 통해 사물과 일상의 의례 관계에 눈을 떴다. 이후 미국에 체류하며 앨런 긴즈버그와 닐 캐시디 등을 만나 히피와 비트닉과 팝의 영향을 흡수하고 인도 여행을 통해 이룬 인식론적 전환을 바탕으로 혁신적 망상을 펼치게 된다.

미국 체류는 사실 우연의 산물이었다. 인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던 1962년, 급성 신장염으로 죽을 고비를 맞은 소트사스를 구한 것은 고용주였던 로베르토 올리베티였다. 올리베티가 치료비를 후원해 스탠퍼드대학에서 특수 치료를 받도록 배려했던 것. 입원 기간 동안 소트사스는 부인과 함께 잡지를 공동으로 편집하며 사상적 발전을 이뤘다. 잡지의 제목은 병실의 번호를 그대로 딴, <동편 128번방 연대기(Room East 128 Chronicle)>. 콜라주로 편집되고 일일이 손으로 프린트된 잡지의 주요 기능은 동료들과 교우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소트사스 부부는 미국에서 막 발흥하고 있던 비트닉 등 미 문화의 지형을 이해하고 그 정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주를 거부하고 유목적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인 비트 세대도 조로아스터나 불교와 힌두교 등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을 통해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곤 했다.)
 

이탈리아에 돌아온 소트사스는 1963년부터 도자기 연작으로 토템 형태의 건축적 망상을 물화해내기 시작했다. (기본 형태는 멘히르[입석], 지구라트, 스투파, 소화전, 가스 펌프 등이었다.) 이 망상이 정말로 건축물로 전치된 때는 1972~1973년. 리소그래프 연작 <축제로서의 혹성(Planet as Festival)>에서 작가는 여태 자신이 고안하고 제작해온 도자기 형태들을 삶의 즐거움을 담아내는 용기로서의 사원 건축-거대한 찻주전자나 아즈텍 사원이나 인디언 종교 시설처럼 생긴 약물을 취하고 성교하기 위한 슈퍼-악기로서의 건물 혹은 음악을 듣고 별을 관찰하기 위한 건물 등-으로 제시하는 과단성을 뵌다. (새로운 건물이 펼쳐지는 혹성은 마치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된 지구처럼 생겼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상상의 건축물들이 1973년 <인디언의 기억(Indian Memories)> 연작에서 다시 실용 가능한 스케일의 찻주전자로 전환-제시됐다는 사실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의 개념적 유희가 처음 유비적 순환 구조를 통해 구현됐던 셈.

(비고: 종말 이후 폐허에서 펼쳐지는 건축적 망상을 바탕으로 포스트모던 디자인 문법을 개척한 이로는 소트사스 외에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 1939~)를 꼽을 수 있다. 퍼셰도 건축가였지만, 주된 활동 영역은 가구 디자인이었다.)

인류학/기호학적 시선으로 특정한 지역을 직접 조사·연구함으로써 새로운 통찰력을 얻은 것은 로버트 벤추리와 에토레 소트사스만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의 공간성을 (재)해석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다 분명히 깨우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는 아랫세대인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였다. 콜하스는 자신의 저서 <정신착란증의 뉴욕: 맨해튼을 위한 반동적 선언문(Delirious New York: A Retroactive Manifesto for Manhattan)>(1978/1994)에서 마천루의 도시 맨해튼의 현대건축문명을 건축 민속학의 탐구 대상으로 삼아 재해석함으로써, 포스트모던 건축의 문법을 심화·발전시킬 이론적/실무적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그는 대학원생들을 동원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렇게 손에 넣은 자료의 한 층위(échelle)를 담론적으로 분석한 뒤, 유형학적 과대평가(typological overestimation)를 통해 비정상적인 건축적 매스-해당 장소의 건축적 맥락에 대한 메타 비평으로 독해 가능한-를 도출하는 특유의 수법을 발전시켰다. 콜하스로 대표되는 리서치 기반의 비평적 건축 설계 방법론은 탈냉전기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계보에서 일종의 신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2008년을 전후해 매너리즘으로 변질됐다.

(비고: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건축 전공자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되던 <정신착란증의 뉴욕>이 재출간된 해가 1994년이었던 점, 그리고 렘 콜하스의 수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21세기 오늘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자리매김한 조민석이 2003년 귀국하며 설립했던 건축설계사무소 이름이 ‘매스스터디즈(Mass Studie)’였음을 상기하자.)


-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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